‘파묘’ 최민식의 책임감…‘땅의 트라우마’ 치유하는 어른 [인터뷰]

한겨레 2024. 3. 1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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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배우 최민식. 씨네21

최민식은 20여년 전부터 연기란 신내림처럼 자기의 몸 전체에 영혼을 집어넣는 과정이라고 설파해왔다. 최민식에 따르면 연기는 “촬영 전까지 인물의 내외면을 분석해 감독과 충분한 상의를 거친 후” 크랭크인을 하는 순간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게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돼 ‘굿 한판’을 벌이는 일”이다.

그런 그가 굿과 풍수의 신명으로 가득한 오컬트 영화 <파묘>로 돌아왔다. 그가 분한 베테랑 풍수사 김상덕은 돈을 많이 준다는 소식에 파묘에 돌입하는 속물이지만, 묏자리에 얽힌 저주를 파악한 순간 물러서지 않고 악귀를 제거하는 작업에 뛰어든다. 상덕의 호는 호랑이의 눈, ‘호안’(虎眼)이다. 그 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최민식 또한 김상덕의 시선에 유의하며 풍수사의 영혼을 입어갔다.

*인터뷰에 <파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굿의 종류나 풍수 용어가 다수 등장한다. 풍수사 상덕이 전문성을 보이는 여러 개념들을 어떻게 체화해갔나.

= 오컬트 영화에 처음 출연하지만 장르에 관한 생경함은 없었다. 풍수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젊은 관객들에게 생소하게 들릴진 몰라도 나에겐 꽤 익숙한 단어들이었다. 무속과 풍수가 한국인의 삶에 알게 모르게 녹아 있지 않나. 손없는날에 맞춰 이사를 한다든지 장례식에 다녀온 후엔 소금을 뿌린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우리 영화의 소재들이 오랫동안 우리 곁에 존재했던 개념들이라 장르에 관한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

- 상덕은 직업의식 이상으로 땅에 애정을 품은 풍수사다. 영화엔 상덕이 땅의 의미를 술회하는 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도 두 차례 있다.

= 장재현 감독이 촬영 초반 내게 “<파묘>를 통해 우리 땅이 가진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싶다”고 전했다. 땅의 트라우마라니! 신선한 표현이었다. 장재현 감독의 전언이야말로 우리 영화의 주제고 감독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상덕은 속물이다. 처음 파묘에 들어가는 동인도 돈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상덕은 딸의 결혼과 곧 태어날 손주를 생각하며 후손들이 밟아야 할 땅에 흉측한 것이 존재하면 안 된다는 일념을 내세운다. 상덕은 베테랑 풍수사로서 그리고 시대의 어른으로서 마지막 책임감을 수호하는 사람이다.

빨뿌리 담배 자세부터 바람의 감촉, 흙의 맛…

- 상덕이 습관적으로 피우는 담배는 대본에 명시돼 있었나. 흡사 차례상에서 피우는 향 같다는 생각도 했다.

= 일부러 예스런 느낌을 주고 싶어 빨뿌리 담배를 피우는 듯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상덕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풍수사라는 직업은 옛 문화를 연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담배를 태우는 자세부터 전통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디테일을 보이고 싶었다.

- 화림(김고은)의 굿이나 영근(유해진)의 염처럼 가시적인 행위를 동반하지 않지만 <파묘> 속 상덕은 관객에게 시선의 단서를 제공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처음 파묘를 위해 산에 오를 때도 가장 뒤에서 산세를 관찰하고, 주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보국사도 먼저 알아챈다. 흡사 상덕이 사건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형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 상덕의 시점이 대본 안에 정확히 명시돼 있었다. 가령 상덕이 봉분 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는 장면도 무덤의 방향과 상덕의 응시점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배우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떤 장면이 나올 것이라는 걸 의식하고 연기하면 안 된다. 상덕도 뒤에 첩장된 오니가 나올지 극 중에서 몰라야 하기 때문에 감정의 빌드업을 위해선 순간의 시퀀스에만 충실하고자 했다.

풍수사라는 직업은 이렇다 할 시각적 지표가 없다보니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풍수사처럼 보여야 하는 고민은 늘 있었다. 이마에 ‘풍수’라 써놓고 내내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인데(웃음) 40년을 땅 파먹고 살아온 사람의 모습이 나를 통해 드러나야 했다. 오랜 시간 풍수사로 살아온 사람은 깊은 시선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땅을 바라보든 산에 오르든 일반 등산객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겠나. 바람의 감촉, 물길의 방향, 흙의 맛 등에서 느끼는 오감을 열고 상덕의 시선에 유의하며 연기했다.

- <파묘>의 네 주연 캐릭터 중 상덕이야말로 가장 ‘끝까지 묘를 파는’ 캐릭터다. 상덕은 베테랑 풍수사라 파묘 행위와 쇠침 뽑기가 가져올 위험성도 알았을 텐데 과업을 완수하려는 과단성을 보인다.

= 끝까지 속물은 아닌 거다. 평생 흉지와 길지를 판가름하며 경제생활을 영위해왔지만 인간이 사는 땅에 그런 흉측한 것이 존재하면 안 된다는 풍수사로서의 마지막 양심이 있었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세상의 위험을 제거하자는 선언에 나머지 셋이 동의해준 것이다. 그걸 보면 네 사람 모두 아주 영악한 이들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실리를 따지지만 캐릭터마다 내면에 순수함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파국 이후, 시간이 허락하는 치유

- <파묘>는 영화 초반 은근한 견제를 보이던 네 캐릭터가 결국 합심해 공동의 목표로 돌진하는 앙상블 영화다. 카메라 안팎에서 나머지 세 배우와의 화학 작용은 어땠나.

= 유해진 배우야 워낙 베테랑이라 큰 걱정을 안 했다. 김고은 배우와 이도현 배우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나이 차도 크다 보니 불편할까 염려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이들은 프로페셔널이다. 그래서 협업이 어떤 의미인지 명징히 알고 있었다. 대본 리딩 후 뒤풀이도 가져보니 이들과 함께라면 ‘묘벤저스’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네 배우가 서로 생각하는 <파묘>의 방향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 좋다.

결국 영화 촬영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촬영 중 “이번엔 이렇게 해보자”라고 새로 시도해보는 것이 설령 의구심이 들어 불편할지라도 수반돼야 한다. 장재현 감독의 경우도 그렇다. 앞선 두편의 장편영화로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어 안전한 길로 안주하기도 쉽고 남의 시선을 의식한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개의치 않고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그 용기가 좋다.

-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네 캐릭터는 모두 파묘 중 마주한 오니의 영향 아래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유사 가족처럼 한데 화합해 추억을 남긴다. 비극과 희망이 혼재된 결말을 배우로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 <파묘>의 결말이 참 좋았다. 네 사람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여러 사건이 이들에게 남긴 육체적, 정신적 상흔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 상흔을 분명히 적시한 채 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는 진리를 내포한 엔딩이라 마음에 들었다. 장르 관습으로 만든 유치한 결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겪은 형이상학적 파국의 여지는 남겨 두되 시간이 허락하는 치유를 보이는 결말이다.

정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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