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청량돌’, 바로 이거지예

조지윤 기자 2024. 3. 1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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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암흑기였던 케이팝 남자 아이돌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제2의 뉴진스라 불릴 만큼 풋풋함으로 중무장한 보이 그룹들이 하나 둘 데뷔하면서 뭇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길고 긴 시간을 돌아 다시 돌아온 청량돌.

제로베이스원
아이돌을 덕질해봤다면 알겠지만, 남자 아이돌과 '청량’은 실패할 수가 없는 조합이다. 특히 신인이라면 놓칠 수 없는 콘셉트다. 간절하게 꿈꾸던 데뷔를 한 직후에만 나올 수 있는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분위기는 오직 그 시절에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K-팝 골수팬이라면 요즘 가요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201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여자 아이돌 전성시대 속에서 최근 데뷔하는 남자 아이돌들의 성장세가 무섭다. "가슴에 사랑이 없다"며 새로운 덕질 대상을 찾아 헤매던 K-팝 망령들이 하나둘 저격당하고 있다.

Mnet 서바이벌 프로그램 '보이즈 플래닛’을 통해 지난해 7월 데뷔한 제로베이스원(ZEROBASEONE)은 데뷔 9일 만에 음악방송 1위를 차지했다. 제로베이스원은 데뷔 전부터 이미 앨범 선주문 108만 장을 돌파했고, 발매 첫날에만 124만 장을 판매하며 케이팝 그룹 최초로 데뷔 첫 날 밀리언셀러 반열에 올랐다.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에서 9년 만에 내놓은 신인 보이 그룹 투어스(TWS) 또한 데뷔 23일 만에 음악방송 1위를 차지했다. 타이틀곡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가 벅스와 애플뮤직 한국 1위에 올랐다. 멜론, 바이브 등 대부분의 음원 사이트 일간 차트에서도 톱 10을 유지 중이다.

투어스
성공적으로 데뷔를 마친 5세대 보이 그룹의 공통점으로 청량미를 앞세운 이지 리스닝 계열 데뷔곡이 꼽힌다. 신인 가수가 부를 때 그 효과가 배가되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음악과 콘셉트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

제로베이스원의 데뷔곡 'In Bloom’이 대표적이다. 대중적이고 에너제틱한 바이브에 불완전하고 미숙하지만 '너’를 향해 달려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가사를 입혔다. 콘셉트 포토에서부터 흰 꽃이 무더기로 피어난 초록 언덕을 배경으로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소년미를 드러냈다. 이어 음악방송 무대에서도 세일러복과 교복을 연상케 하는 의상을 입거나 흰색, 분홍색, 하늘색 등의 색상을 활용해 산뜻함을 더했다. 데뷔 쇼케이스에서 멤버들은 "딱 봐도 청량 바이브가 뭔지 아실 수 있을 것" "제로베이스원만의 청량 에너제틱 바이브를 담아내 청량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등 청량함을 강조했다.

SM엔터테인먼트가 7년 만에 선보인 보이 그룹 라이즈(RIIZE) 역시 SMP(SM Music Performance) 장르가 아닌 청량한 데뷔곡을 선보였다. SM 소속 아이돌이라면 한 번쯤은 거쳐 간다는 SMP 장르는 사회비판적이고 어두운 분위기의 곡이다. 슈퍼주니어, 엑소, 에스파 등 SM 대표 아이돌 가운데 SMP 장르의 타이틀곡으로 데뷔한 수도 상당하다. 하지만 지난해 9월 공개한 라이즈의 데뷔 싱글앨범 'Get A Guitar’는 SMP의 색깔을 지우고 대중적이면서 펑키한 사운드를 연출했다. 대놓고 청량을 앞세우기보다는 힙하고 트렌디함을 내세웠지만 '소년미’는 놓치지 않았다. 가볍게 통통 튀는 스텝에 기타를 따라 치는 듯한 안무와 발랄하고 유쾌한 무드의 무대 연출까지.

라이즈
청량돌의 대표 주자 세븐틴의 동생 그룹 투어스 또한 데뷔곡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를 통해 그들의 뒤를 이어간다. 쏟아지는 햇살을 배경으로 흰 셔츠를 입고 찍은 콘셉트 포토에서는 신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순수함과 새로운 시작을 향한 기대감이 전해진다. 무대 의상도 흰색이나 푸른색 계열 품이 큰 옷이나 교복 등의 콘셉트로 첫사랑을 겪는 소년들 모습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제목에 담긴 '첫’이라는 글자에서 느껴지는 풋풋함은 서툰 마음을 고백하는 가사에서도 흘러넘친다. 이에 팬들은 "한국 하이틴 느낌 물씬 나는 한국어 가사 노래가 좋다" "첫 만남 잘됐는데 뭐가 자꾸 어렵다는 거야" 등 오랜만에 돌아온 청량돌에 대한 반가움을 드러낸다.

사실 그간 남자 아이돌들의 데뷔곡은 강렬하고 박력 있는 이미지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격렬한 데뷔곡에 반전 있는 후속곡이 바로 '성공한’ 남자 아이돌들의 흥행 공식이었다.

2세대 보이 그룹의 대표 주자 '슈퍼주니어’는 SMP 콘셉트 아래, 운명을 거부한다는 강인한 메시지를 담은 곡 'Twins (Knock Out)’으로 데뷔하고 후속곡인 'Miracle’로 청량함을 뽐냈다. 'SS501’도 이별과 배신을 주제로 한 데뷔곡 '경고’ 이후 산뜻한 분위기의 '스노우 프린스’로 후속 활동을 이어갔다. '짐승돌’로 인기를 모은 2PM도 거침없는 비보잉과 아크로바틱 퍼포먼스로 무장한 '10점 만점에 10점’으로 데뷔했지만 후속곡으로는 'Only You’를 선택했다. 이후 2PM의 음악방송 무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상큼하고 아기자기한 콘셉트의 노래다.

청량보다는 '청양’ 매운맛 릴레이

몬스타엑스 데뷔 콘셉트.
이 같은 성공 방정식은 남자 아이돌의 전성기로 불리는 3세대까지도 이어졌다. 엑소의 데뷔곡은 'MAMA’다. 파편화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주를 이룬 정통 SMP 음악으로 데뷔 당시만 해도 대중성을 잡지는 못했지만 '슴덕(SM 팬)’들을 중심으로 코어 팬을 다졌다. 21세기 팝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방탄소년단(BTS)의 데뷔곡은 'No More Dream’으로 "얌마 니 꿈은 뭐니"라는 가사를 4분이 채 안 되는 플레이타임 동안 10여 차례를 반복하며 획일화된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 외에도 몬스타엑스의 '무단침입 (Trespass)’, 위너의 '공허해’ '컬러링’, NCT127의 '소방차(Fire Truck)’ 등도 청량보다는 '청양’에 가까웠다. 갓세븐의 'Girls Girls Girls’와 워너원의 '에너제틱 (Energetic)’ 역시 매운맛이 아닐 뿐 청량하기보다는 펑키하고 격정적인 멜로디의 곡들이다.

물론 '모두’가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다. 활동의 대부분을 청량 콘셉트로 이끌어간 세븐틴은 시작부터 '아낀다’라는, 통통 튀고 청춘 멜로 무드를 담은 데뷔곡을 선보였다. 샤이니의 '누난 너무 예뻐(Replay)’, 아스트로의 '숨바꼭질’처럼 소년미를 강조하는 보이 그룹도 있어왔지만 보편적인 트렌드가 아니었다는 것.

화려한 퍼포먼스와 귀에 때려 박는 래핑, 강렬하고 비장한 사운드가 주를 이룬 까닭으로는 해외 진출을 노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국내 팬들은 따라 부르기 쉽고 후킹한 멜로디의 이지 리스닝 계열 노래를 좋아하는 반면, 해외 K-팝 팬들은 콘서트에서 빛을 발하는 카리스마 있고 웅장한 노래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다. 이전까지의 사례들을 톺아볼 때 '매운맛’이 성공한 남자 아이돌들의 보편적인 데뷔곡 경향으로 굳어졌기에 굳이 도전보다는 안전한 길을 택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아이돌 판에서 '영원한’ 흥행 공식은 없는 법.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남자 아이돌 전성기는 4세대가 오면서 그 열기가 차츰 식어갔다. 여론 조사 기관 한국갤럽에 따르면 10대가 꼽은 '2023년을 빛낸 가수’ 5위권 내 보이 그룹은 BTS(3위)가 유일했다. 이 외에는 뉴진스, 아이브, 블랙핑크, 아이유 등이 순위를 차지했다. 2010~2014년까지만 해도 엑소, 비스트, 빅뱅 등 3개 이상의 보이 그룹이 5위권 내에 이름을 올렸고, 2018년까지도 최소 2개 이상의 보이 그룹이 선정됐다. 하지만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2019년부터 10대가 꼽은 '올해를 빛낸 가수’로 BTS 외 보이 그룹이 5위권 안에 든 적은 없었다.

대중성 대신 코어 팬덤을 잡기 위한 세계관 중심의 컨셉추얼한 기조가 이어지면서 남자 아이돌에 대한 허들이 높아졌기 때문일까. 최근 남자 아이돌 노래 가운데 슈퍼주니어의 '쏘리쏘리(SORRY, SORRY)’나 빅뱅의 '거짓말’ 등 일명 '떼창’이 가능하고 가볍게 흥얼거릴 수 있는 곡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신나는 멜로디와 화려한 퍼포먼스에 속아(!) 마이크를 잡았다가는 노래방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법한 아이코닉한 노래들이 K-팝 남자 아이돌 판을 채워나갔다.

10대들의 최애 가수는 걸 그룹?

뉴진스.
그 틈을 치고 걸 그룹들이 '나다움’이라는 콘셉트로 데뷔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귀여움, 섹시함 등의 이성적인 매력에 방점을 찍은 것과 달리 '정체성’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들고 나온 것. 에스파, 르세라핌, 아이브 등은 사랑을 노래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성장이나 내면의 강인함 등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어필할 수 있는 가사에다가 중독성 강하고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의 곡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인기를 모았다. 여성 팬까지 모아들이며 남자 아이돌은 팬덤, 여자 아이돌은 대중성으로 유지된다는 공식도 흔들었다. 특히 데뷔곡부터 3연속 음원 1위, 음반 밀리언셀러에 등극한 아이브는 '초통령’으로서 동심까지 사로잡았다. 아이브 포토 카드를 구하느라 발품 파는 엄마들의 웃픈 사연도 맘 카페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

나아가 '뉴진스 신드롬’이라는 문화 현상까지 만들어낸 대형 신인 뉴진스가 등장한다. 뉴진스는 K-팝 여성 아티스트로서 최초로 '2024 빌보드 위민 인 뮤직 어워드’에서 올해의 그룹상을 수상할 만큼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데뷔 무대에서 5명의 소녀가 검정색 긴 생머리에 옅은 화장을 하고 청춘을 노래하는 모습은 청량 그 자체였다. 업계에서는 5세대 보이 그룹이 앞다퉈 청량 콘셉트로 데뷔하는 것을 두고 "뉴진스의 영향이 크다"고 설명한다. 'Attention’ 'Hype Boy’ 'Ditto’ 등 내놓은 곡마다 족족 메가 히트를 기록하는 모습에서 청량 콘셉트의 가능성을 엿봤다는 것. 청량 콘셉트가 남자 아이돌계의 스테디셀러인 것은 분명하지만, 성공적으로 데뷔를 마친 보이 그룹들이 3연속 청량을 콘셉트로 곡을 선보였다는 데서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죄다 비슷한 콘셉트로 격렬하고 폭발적인 노래를 선보인 남자 아이돌들 틈에서 소년미를 앞세운 신입 그룹이 인기를 얻은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 오히려 모두들 또다시 비슷하게 '청량’을 노래하는 가운데 앞으로 어떤 곡과 콘셉트를 보여줄지에 따라 이들의 '다음’이 달려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청량미와 소년미는 장기적으로 가져가기 어렵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첫 만남을 무사히 마친 5세대 남자 아이돌들이 선사할 두 번째 만남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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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웨이크원 플레디스 SM엔터테인먼트 어도어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조지윤 기자 geor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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