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배구계 현실…“넌 다음에 해!” 말뿐인 공개 모집
지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배구는 최악의 성적을 냈다. 남자 배구는 1962년 자카르타 대회 이후 61년 만에 여자배구는 2006년 도하 대회 이후 17년 만에 메달 없이 빈손으로 귀국했다. 한국 배구는 이제 세계 대회 출전은커녕 아시아 무대에서도 이렇다 할 존재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이 굴욕적인 사건을 교훈 삼아 대한배구협회는 남녀 대표팀 감독을 모두 교체했고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외부 전문가까지 초청해 공청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난달 새 대표팀을 이끌 지도자를 공개 모집했다. 야심 찬 출발을 알린 신호탄이다.
당시 대한배구협회는 "2월 28일까지 후보자 공개 모집 뒤 서류 심사를 거쳐 3월 중 경기력 향상위원회 면접 평가와 인사위원회 심의를 진행해 경쟁력 있는 지도자를 선발하겠다."고 밝혔다.
과연 대표팀 감독 선임은 배구협회가 밝힌 이 근사한 계획처럼 잘 진행되고 있을까?
KBS 취재 결과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
대한배구협회의 밀실 행정이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공개적으로 모집하고 있지만, 협회 내부에서는 이미 후임 감독에 대한 특정 가이드 라인이 있고 심지어 특정인을 밀고 있는 정황도 확인됐다.
공개 모집 마감 결과 남자 대표팀 감독 후보 지원자는 4명(현직 프로팀을 지휘하고 있는 A 감독과 외국인 감독 3명), 여자 대표팀 감독 후보 지원자는 3명으로 파악됐다. 여기엔 과거 청소년대표팀을 지도한 경력이 있는 B 감독과 복수의 외국인 감독 2명이 지원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배구협회가 밝힌 감독 선임 과정에 따르면 후보 지원 접수 다음 절차는 경기력 향상 위원들이 평가하는 후보자 면접이다. 그런데 12일로 예정된 면접도 이뤄지기 전에 이미 대표팀 감독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정해졌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배구계 관계자는 "지난주 이미 외국인 감독 아닌 국내 감독으로 대표팀 감독을 맡기는 것으로 가닥이 났고 현직 프로팀 감독의 겸임 쪽으로 의견이 모였어요."라고 취재진에 전했다.
관계자의 설명대로라면 후보자 면접이 이뤄지기 전에 특정 인물로 대표팀 감독이 내정된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이 내용과 함께 현재 남자 대표팀 감독 모집에는 현직 프로팀 감독 A씨가 지원했지만, 여자 대표팀 감독 모집에는 현직 프로팀 감독 지원자가 없어 곧 재공고가 게시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대한배구협회의 대표팀 지도자 공개 안내문 지도자 자격 요건 그 어디에도 국내 감독이어야 한다고 명시되지 않았음에도 협회 내부에서 국내 감독, 현직 프로팀 사령탑으로 의견이 모였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취재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는 또 있다. 공개 모집 지원을 놓고 암묵적인 협박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공개 모집은 이전과 달리 한국 배구의 체질 개선을 위한 개혁 측면에서 많은 젊은 배구 지도자들이 감독 후보에 지원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동안 한국 배구를 지탱해 왔다고 자부하는 '어르신들'의 설득을 가장한 협박에 막혀 지원조차 하지 못한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난 것이 확인됐다.
몇 년 전 프로 선수를 은퇴한 40대 지도자 C 씨는 뜻이 맞는 선배와 함께 코치로 이번 공개 모집에 지원하려고 했지만, 현 배구협회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 배구 원로의 암묵적인 반대에 부딪혀 지원을 포기했다.
C 씨는 취재진에 "그분이 전화를 걸어 조용히 이번에는 지원하지 않으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셨어요. 다음에 기회 되면 그때 하라고... 다음에 언젠가 너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하셨죠." 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배구계에는 그동안 암묵적인 카르텔이 형성되어 왔다. 선후배로 얽혀있는 배구계에서 속된 말로 감독이 될 차례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직 지원에도 선배 다음에 후배가 이뤄지는 순서가 있고 그것을 배구 원로들이 결정해주는 순번이 있다는 것이다. 국제 경쟁력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서 대표팀 감독 선임에서조차 경쟁력이 무시되고 있다.
한 배구 관계자는 배구협회가 내부적으로 정한 '새 대표팀 감독은 현직 프로팀 감독, 프로팀 감독의 겸임'이라는 방침에 대한 우려도 표했다. 대표팀 체질 개선을 위해 지금부터 시스템을 만들고 유망주를 육성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인데 프로팀 감독을 선임해 겸임으로 맡긴다는 것이 경쟁력 강화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설명이다.
프로팀 일정이 당장 4월 아시아 쿼터 선수 선발과 5월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 6월 FA 선수 계약 마무리 등 매달 빠듯한 일정이 잡혀있는데 대표팀 훈련은커녕 결국 본인이 속한 프로팀 선수를 대표 선수로 선발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것 아니겠냐는 의혹만 키운다는 것이다.
대한배구협회의 대표팀 감독 공개 모집 공고에 따르면 새로 선발되는 지도자의 계약 기간은 2024년 국가대표 지도자 업무 시작일로부터 2026년 국제대회 종료 시까지이다. 단, 2025년 국제대회 뒤 재평가를 실시한다고 조건을 명시했는데 이렇게 되면 1년 단기 감독이 나올 확률이 높다. 즉, 프로팀 감독의 대표팀 감독 겸임 자체가 1년 시간만 보내고 본인 소속 선수의 대표 선발 특권으로 악용될 우려만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프로팀 운영으로 바쁜 일정에 대표팀 지도까지. 새로운 체제로의 대표팀 개혁은커녕 시간 때우기 반쪽짜리 지도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선발 조건인 셈이다. 대한배구협회의 방만한 운영과 대책 없는 계획이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올랐다.
일부에선 당장 올림픽 예선이 다가온 것도 아니고 1년쯤이야 시험 삼아 임시 체제로 운영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배구협회가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 '그들만의 리그', '침묵의 카르텔' 식으로 운영해오다 항저우아시안게임과 같은 최악의 사태를 경험했다.
대한배구협회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참사를 교훈 삼아 공청회를 열었지만, 공청회에서도 이렇다 할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남녀 대표팀 감독은 교체했지만, 김철용 여자배구 경기력 향상 위원장은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고도 재선임하는 이해 못 할 결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출발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대표팀 감독 모집.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2028 LA 올림픽 출전권이 부여되는 2026 아시아선수권대회를 대비해 한국팀만의 특성을 극대화하면서 국제대회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선수들을 육성해 대표팀을 이끌 지도자, 국제 배구 흐름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을 갖췄으며, 선수들과 소통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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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미 기자 (jjum@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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