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풀고 세금 깎고…‘선거노믹스’에 전세계가 몸살

홍석재 기자 2024. 3. 1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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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70개국 선거 ‘선심성 정책’ 남발
대선 승리를 위해 선심성 공약도 마다하지 않는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EPA, AFP 연합뉴스

영국 보수당 리시 수낵 정부는 지난 6일 100억파운드(약 17조원) 규모의 추가 감세를 발표했다. 제러미 헌트 재무장관은 이날 오후 의회에서 2024년 봄 예산안을 발표하면서 다음달부터 근로자와 자영업자의 소득에 따라 부과되는 국민보험(NI) 부담금 요율을 2%포인트씩 인하한다고 밝혔다. 국민보험 인하에 따른 비용은 연간 100억파운드로 추산됐다.

보수당의 최근 세금 감면 정책은 올해 하반기 열릴 것으로 보이는 총선 패배 가능성이 크자 재정 상황 악화에도 불구하고 내놓은 선심성 정책이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다.

이런 비판은 영국뿐만이 아니다. 올해는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 70개 이상 나라에서 전국 선거가 열리는 슈퍼 선거의 해다. 전세계 정치권에서 ‘일단 당선되고 보자’는 마음으로 꺼내 든 인기 영합 경제 정책이 만연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과도한 금융 완화나 재정 지출 그리고 선심성 정책 등을 남발하는 이른바 ‘선거노믹스’(electionomics· 일렉셔노믹스)에 대한 우려가 많다. 최근 한국에서도 정부·여당이 내놓은 339㎢ 군사시설 보호구역 해제, 주식·채권·펀드 같은 금융상품 투자 수익에 매기는 세금인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이 ‘포퓰리즘 경제 정책’이라는 논란을 부르고 있는데,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우려가 인다.

여론조사업체 입소스가 지난달 말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영국 보수당 지지율은 20%에 그쳤다. 이 회사 조사 기준으로 1978년 이후 46년 만에 최저다. 노동당 지지율 47%와 견주면 27%포인트 차이가 나며, 14년째 집권 중인 보수당은 이대로 선거를 치르면 정권을 내줄 판이다.

이 때문에 수낵 보수당 정부는 총선 패배를 면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지난해 11월 200억파운드(약 33조7800억원) 규모의 감세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또 올해 수낵 정부는 코로나19 세계적 대확산 기간이던 2020년을 빼고 역대 최대이자, 지난 10년 평균의 3배가량 많은 국채 판매를 계획하고 있다.

선거노믹스는 주로 정책 결정권을 쥔 여당이 꺼내기 쉽다. 오는 11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재대결이 유력한 미국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바이든 정부의 민주당은 올해만 만기 2~30년짜리 채권 4조달러(약 5348조원)어치를 발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 자산운용사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에 따르면, 미국 대선을 앞둔 올해 풀리는 채권은 지난해 3조달러, 2018년 2조3천억달러와 견줘 각각 33%, 74%나 급증한 규모다.

내각 지지율이 전례를 찾기 어려운 10%대까지 떨어진 일본 집권 자민당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국민 1인당 4만엔(약 34만원)에 이르는 감세 정책을 반전 카드로 흔들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영국은 경제 정책의 키를 쥔 집권 보수당이 패배를 면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감세와 채권을 이용하고 있다”며 “(일본 역시)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는 기시다 총리가 9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있어 한시적 소득세 감세와 휘발유 가격 억제 보조금 등을 중단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풀이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선 집권 여당 총재가 총리가 된다.

2014년 5월부터 10년째 집권 중인 인도인민당(BJP)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올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도 내년 예산안 지출 규모를 전년 대비 6% 증가로 억제하고 있다. 인도인민당이 이끄는 정당 연합인 국민민주동맹(NDA) 지지율이 40%대에 이르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가 있다. 하지만 이런 모디 정부도 농민에 대한 현금 지급 등 ‘선심성 표밭 대책’만큼은 빼놓지 않고 있다. 미국 자산운용사 야누스 헨더슨의 짐 셀린스키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일부 국가는 이미 재정 적자가 통제 불능 상태인데도 이를 통제할 메커니즘조차 없는 게 현실”이라며 “이 문제가 앞으로 6~12개월 안에 시장에 심각한 우려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선거노믹스가 집권당만의 무기로 쓰이는 것만도 아니다. 야당이 선거노믹스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11월 아르헨티나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밀레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경제위기를 해결하겠다며 복지 삭감, 중앙은행 폐쇄, 미국 달러 통화 채택 같은 극단적 공약을 남발했다. 지난해 11월 그가 대통령에 선출됐고 공약 일부는 새 정부의 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가톨릭대학(UCA) 조사에 따르면 밀레이 대통령 집권 뒤인 지난 1월 빈곤율은 57.4%로 20년 만의 최악의 수치를 기록했다. 미국에서도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부자 감세, 법인세 인하 같은 주장도 굽히지 않고 있다. 자산운용사 프랭클린 템플턴의 데이비드 잔은 “바이든과 트럼프 모두 높은 수준의 정부 지출을 할 것이란 점은 큰 변화가 없을 것 같고, 결국 미국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선거노믹스는 고질적 문제 다. 약 50년 전인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나선 공화당 소속의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의 대결이 대표적이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일렉셔노믹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포드 대통령이 민간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해 전 280억달러(약 37조4천억원) 감세안을 제안했던 것을 강조했다”며 “‘적자가 심각한 상황에 추가로 이렇게 큰 감세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연방 지출도 함께 요구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에 맞서 카터 당시 후보는 “경제 성장 등으로 향후 5년간 세금 인상 없이 지출을 늘리면서 예산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라 살림이야 어떻게 되든 표심을 얻을 마음으로 세금 인상 없는 대규모 지출이 가능하다는 무리한 주장을 한 것이다.

선거노믹스는 최근 중앙은행을 동원하는 등의 방식으로 더 교묘해지고 규모도 커지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캐롤라 바인더 해버퍼드대 교수(경제학)가 낸 논문 ‘중앙은행에 대한 정치적 압력’(2018년)을 보면, 2010∼2018년 사이 세계 118곳 중앙은행의 약 10%가 해마다 한차례 이상 정치적 압력이나 정부의 간섭에 직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39%는 조사 기간 가운데 특정 시기에 압력에 직면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바인더 교수는 “대부분 압력은 더 쉬운 통화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중앙은행에 대한 정치적 간섭은 개발도상국 및 선진국 모두에서 발생하는 전세계적인 현상”이라며 “견제와 균형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정부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풀이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전례 없는 ‘슈퍼 선거의 해’에 시험대에 오른 것은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강인함을 보여주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다”라며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대선 후보나 정당들이 제시하는) 거시경제 정책의 타당성과 건전성도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거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과도하게 활용된 거시경제 정책은 장기간 커다란 후유증을 남긴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게다가 전세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는 2010년 70% 수준이던 게, 2020년 90%에 육박하더니 최근 3년간 100%를 넘나들 만큼 이미 위험 수위에 와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국제금융협회(IIF) 보고서를 인용해 “다가오는 선거가 사회적 긴장을 통제하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이어질 경우, 정부 차입은 더 많아지고 재정 규제는 더 축소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슈퍼 선거의 해’ 기간에 정부 지출이 급증하면 이미 높은 수준의 국가 이자 부담을 더욱 가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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