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오르던 진보 의사가 의협 선거에 출마한 이유
2월28일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다. 한국에 의사 수가 부족하다고 보는 의견은 74%, 의대 정원 확대에 동의한다는 답변은 68%였다. 의료 대란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는 ‘의료계 책임이 더 크다’는 답변이 50%로, ‘정부 책임이 더 크다(18%)’는 응답을 훌쩍 웃돌았다. 2020년 8~9월 의사 집단행동 당시보다 의사들의 책임을 묻는 여론은 6%포인트 더 높아졌다.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을 발표한 직후 의료계는 대규모 반대행동에 나섰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론 지형에서 고립되고 있다. “지방에 부족한 건 의사가 아니라 민도(주수호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노환규 전 의협 회장)” 등의 발언이 이어지며 민심이 더욱 멀어지고 있다. 2023년 간호법 제정, 2020년 의대 증원, 더 멀게는 2000년 의약분업 때부터 의사들은 집단휴진·파업을 불사하며 보건의료 제도를 개편하려는 정책을 가로막아왔다. 그 중심에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있었다.
의협의 신임 회장을 뽑는 선거가 오는 3월 말 치러진다. 임현택(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 주수호(의협 비대위 언론홍보위원장), 박인숙(전 국민의힘 의원), 박명하(서울시의사회장) 등 후보 4인은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대한다. 2월6일 사퇴한 이필수 전 회장보다 더 강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들 외에, 이번 의협 회장 선거에서 조금 ‘튀는’ 후보가 있다. 바로 기호 5번 정운용 후보다.
정운용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부산·경남지부 대표는 1월11일 “시민과 함께하는 의료 개혁”을 기치로 출마를 선언했다. “의협이 더 낮은 곳에 귀 기울이고 아픈 이들과 함께하며 의사의 전문가적 소임을 다하길 바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힘쓰겠다. 해방 이후 의협 회장 선거에서 최초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시민사회와 연대해온 의사의 도전이다.”
정운용 대표는 2003년부터 부산 노숙인 진료소 소장을 맡고 있다. 고공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을 진료하기 위해 굴뚝과 크레인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맡은 환자 중에는 2011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랐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도 있다. 12년간 외과의사로 근무해온 부산 큐병원은 인의협 회원들이 모여서 만든 의료기관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쪽방 거주자 등 치료받을 길 없는 환자들의 발길이 이곳으로 이어진다.
의료계와 정부의 강대강 대치 속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던 2월26일 서울 종로구 인의협 사무실에서 정운용 대표를 만났다. 출사표에서 밝혔듯 인의협 출신으로는 첫 번째 의협 회장 후보다. 시민들은 인의협을 소수의 진보적 의사들이 모인 단체 정도로 인식하지만 주류 의사 사회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냉담하다. 젊은 회원들은 동료 의사들에게 인의협 소속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고민스러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의협은 예전부터 의사 수 늘리기가 필요하다고 앞장서 주장해온 보건의료단체 중 한 곳이다.
인의협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그해 11월 창립됐다.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산업안전보건 기준을 개선하라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끓어올랐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직업병이 “술 먹고 성매매해서 생긴 신경매독”이라고 주장하는 기성학자들에게 “이황화탄소 중독 때문에 나타나는 중추신경계 증상”이라고 맞섰던 사람이 인의협의 젊은 의사들이었다. 원진레이온 싸움은 ‘녹색병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초반 인의협이 개최하는 토론회에는 의협의 정책이사 등이 참석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의사 사회 내에서 ‘인의협은 개혁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역할 분담이 있었다. ‘너희만 인도주의 하냐’라는 반발심은 꽤 들었겠지만 그래도 나름의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정 대표는 2000년 의약분업 시기를 거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고 말했다. “마치 ‘내부의 적’처럼 여겨지게 됐다. 인의협이니까 의약분업에 찬성하는 의견을 가질 수는 있는데 파업을 비판하면서 의협과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240여 명 수준이던 부산·경남 인의협 회원이 30명까지 급감했다. 지금도 전국의 인의협 회원 수는 500명 남짓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도전이다. 그럼에도 출마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의협은 권익단체에 가깝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의협이 진정한 ‘민주적 전문가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정운용 대표가 보기에 한국 보건의료의 현재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필수의료·지역의료의 공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정책적으로 이 틈을 메울 수 있는 공공의료 인프라와 이에 대한 투자는 매우 부실하다.
“의협, 권익단체에서 벗어나야”
“보건의료 개혁의 주체는 국민이다. 의사는 그 과정에 개입할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다. 의사들이 옳다고 보는 방향이 있다면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려면 의협이 민주적인 전문가 단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의사단체가 의료 개혁의 동력이 아니라 대상이 될 위험마저 있다고 본다.”
의협은 의료법에 규정된 법정 단체다. 의사 면허를 따면 자동으로 가입하게 된다. 의협 회원 수(약 13만명)는 곧 한국의 전체 의사 수인 셈이다. 그러나 정운용 대표는 의협이 전체 의사들의 의견이나 성향을 대변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의협이 보수화를 넘어 극우화되는 경향까지 나타나면서, 단체에 관심을 끄고 눈을 돌려버리는 회원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의협 선거권은 2년 이상 회비를 낸 회원만 가질 수 있다. 회비를 내지 않는 회원이 많은 데다 투표 참여도 저조한 편이다.
“정부가 일단 물러나야 한다”
정 대표는 의협이 전문가를 자임하는 것도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짚었다. “의사들도 보건의료 정책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다. 전문가 집단으로 식견을 갖추려면 내부적으로 활발하게 토론하고 여러 해법이 부딪히며 실력을 쌓아나가야 한다. 의협 주장을 들으면 정치도, 정책도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누군가 ‘당신(의사)은 전문직이지 전문가는 아니야’라고 한 적이 있는데 새겨들었다.”
강경한 목소리가 의협 지도부를 ‘접수’하기 용이한 환경 속에서 2018년 최대집 전 회장이 당선되었다. 당시 최 전 회장이 얻은 득표수는 (전체 회원 수 약 13만명 가운데) 6932표였다. 단상에 머리를 박으며 “의사 회원들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에 피를 뿌릴 것”이라고 소리치던 모습은 일반 시민들의 머릿속에 의협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의대 증원 정국에서 잇따라 터지는 의협 전현직 지도부의 실언은 이런 회장 선출 구조의 결과물이라고 정 대표는 말했다.
정운용 대표는 지난해 10월부터 전국 곳곳을 다니며 의사들과 토론을 벌였다. 인의협 회원도 있지만, 회원이 아닌 이들도 있다. 그 수가 300명가량 된다. 한국 보건의료가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에 공감대가 높았다. 그는 일대 개혁의 과정에서 의사가 더 필요하고, 정부도 대규모 재정지원을 해야 하며, 의사에게도 노동자로서 파업할 권리가 있지만 응급실·중환자실까지 비우는 파업에는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의사들 중에도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30% 정도는 되지 않나 싶다. 최대집 전 회장 다음에 당선된 이필수 전 회장은 비교적 온건하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의협 간부들도 개별적으로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정원 확대를 수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정 대표는 현재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의·정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정부가 일단 물러나야 한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의대 증원을 찬성하는 여론이 높고,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또다시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상황에서 정부 이전에 시민들이 ‘일단 멈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는 시민들의 답답함에 동의하면서도 의대 정원을 확대하는 목적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달라고 당부했다. “윤석열 정부가 의대 증원과 함께 필수의료 패키지를 내놓고 필수·지역의료 대책이 마련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상 이미 왜곡돼 있는 시장구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무능한 거고, 그렇지 않다면 영악하고 못된 것이다.”
정운용 대표가 공약한 ‘민주적 전문가 집단’으로서 의협에는 시민사회와 접점을 넓혀가겠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에 대해 의사 사회의 반감이 높다. 외과의사로서 정 대표도 그 조치가 달갑지 않지만 대리 수술, 불법 수술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동시에 의료라는 영역의 성격상 완전히 0으로 만들 수 없는 불가항력적 사고나, 대학병원 의사·전공의가 과로에 시달리는 환경에 대해서는 이해를 구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신뢰의 토대를 의사와 시민들이 함께 쌓아나가기를 그는 바란다.
당선되어도, 당선되지 않아도 험난한 여정이다. 정운용 대표는 “다른 후보들이 강성으로 분류되지만 보건의료 운동하며 다져온 맷집은 내가 제법 세다”라고 말했다.
김연희 기자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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