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레거시 칩 투자로 급전환…‘버티며 기술 연마’ 봉쇄 뚫기

최현준 기자 2024. 3. 1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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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지경학, 칩 왕좌의 게임
SMIC 베이징 공장 통해 본 새 전략
지난달 29일 중국 베이징 이좡신도시 베이징경제기술개발구에 있는 중국 최대이자 세계 5위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중신궈지(SMIC) 베이징 1·2공장(중신베이팡) 앞 모습. 베이징/최현준 특파원

중국 베이징 중심부에서 남동쪽으로 약 20㎞ 떨어진 다싱구 베이징경제기술개발구 한복판에 중국 최대이자 세계 5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 중신궈지(SMIC)의 베이징 1·2공장(중신베이팡)이 자리하고 있다. 2004년, 2014년 설립된 두 공장은 24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상 300㎜(12인치) 웨이퍼를 매달 16만장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지난달 29일 오전 한겨레가 찾은 공장 앞은 부산했다. 출퇴근용으로 보이는 전동 오토바이 수십대가 주차돼 있고, 택배 기사 여러명이 물건을 실어 날랐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장 문을 나섰다. 공장 주변에는 고급 아파트로 보이는 건물과 다른 정보통신(IT) 기업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1·2공장과 달리, 이곳에서 남쪽으로 10㎞ 떨어진 곳에 있는 중신궈지 베이징 3공장(중신징청)은 활기가 전혀 없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2021년부터 14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었던 이 공장은 예정과 달리 공사가 늦어지면서 아직 생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몇몇 건물은 거의 완성이 됐지만, 골조 공사만 끝낸 것으로 보이는 건물도 눈에 띄었다. 공장 앞에서 만난 한 트럭 기사는 “이곳에 건설 장비 배달을 왔다”며 “공사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했다.

중신궈지 베이징 1·2공장과 3공장은 중국 반도체 산업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00년 국영기업이자 중국 최초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으로 설립된 중신궈지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 5위권 파운드리 기업으로 성장하며 중국 반도체 굴기를 상징하는 기업이 됐다.

2010년대 후반까지 24나노 이상, 이른바 레거시(성숙) 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던 중신궈지는 세계 1·2위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티에스엠시(TSMC)와 삼성전자 등을 따라잡기 위해 최첨단 7나노 반도체 생산 계획을 세우고 베이징에 세번째 공장을 짓기로 했으나 지지부진하다.

관건은 7나노 반도체 생산에 필수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기를 확보하는 것으로, 중신궈지는 2018년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 에이에스엠엘(ASML)로부터 극자외선 노광기 11대를 구입하는 계약을 맺었다. 중신궈지의 계획대로 공장이 완공되면, 중국은 세계에서 세번째로 7나노 반도체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고, 미국보다 첨단 반도체 생산량이 앞서게 된다. 이런 사실을 확인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행정부는 뒤늦게 2020년 12월 중신궈지 계열사 등 59개 중국 기업을 수출 통제 목록에 올리면서 중국이 에이에스엠엘로부터 극자외선 노광기를 확보하는 것을 막았다.

2021년 출범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재를 더욱 체계화하고 강화했다. 2022년 10월 바이든 정부는 18나노 디(D)램과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나노 이하 로직 반도체 등에 대해 기술은 물론 인력·장비의 수출까지 금지하는 제재를 내놨다.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반도체 공급망이 연결된 모든 국가가 이 제재에 참여하도록 강제했다. 바이든 정부는 이후에도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고영화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연구원은 “중신궈지의 베이징 3공장은 결국 중국산 장비를 들여와 애초 계획한 7나노가 아닌 28나노 반도체를 생산할 것”이라며 “미국 제재로 공장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 자립을 반드시 실현하자.”

미국의 초강력 반도체 제재에 가로막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과학기술 자립을 핵심 목표로 정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한다. 첨단 반도체 기술을 스스로 개발해 미국을 뛰어넘자는 것이다. 실제 중국은 올해 과학기술 분야 국가 예산 증가율을 국방예산 증가율(7.2%)보다 높은 10%로 설정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현대 첨단 과학의 결정체로, 한국·미국·유럽·일본·대만 등 선진 기술이 총집결한 반도체 기술을 중국이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중국은 최첨단 기술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는 ‘추격 전략’을 잠시 뒤로하고 구형 레거시 반도체에 집중 투자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기술을 갖고 있고 양적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 집중하면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버티기 전략’에 들어간 것이다. 첨단 반도체는 부가가치가 높지만 사용처가 적은 대신, 레거시 반도체는 부가가치는 낮아도 자동차 등 사용처가 많아 반도체 기술을 연마하고 인력을 확보하기 용이하다.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중국은 구형 반도체 생산 능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레거시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짓는 기업에 최대 10년 법인세 면제 혜택을 주고 있다. 중신궈지는 2022년 본사가 있는 상하이에 28나노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며 89억달러(약 11조원)를 투자하기로 했고, 창안자동차는 지난해 87억위안(약 1조6천억원)을 충칭에 투자해 직접 12인치급 차량용 반도체 제조 공장을 짓기로 했다.

국제 반도체 장비·재료 협회(SEMI) 자료를 보면, 올해 새로 문을 여는 세계 신규 반도체 공장(팹) 42개 중 18개가 중국 공장이다. 한국이 1개, 일본이 4개, 대만이 5개의 새 공장을 여는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수준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지난해 10월 28나노 이상 레거시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비중이 2023년 29%에서 2027년 33%까지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같은 기간 대만의 레거시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49%에서 42%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됐다.

중국의 전략 변경으로 일본과 네덜란드 등의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특수를 누리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레거시 반도체용 생산 장비를 대거 구매하면서 매출이 늘고 주가가 폭등하는 것이다. 일본 캐논은 올해 반도체 장비 매출의 40%가 중국에서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5년 전의 2배이다. 도쿄일렉트론은 올해 실적 전망치가 상향되면서 최근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달 29일 중국 베이징 이좡신도시 베이징경제기술개발구에 있는 중국 최대이자 세계 5위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중신궈지(SMIC) 베이징 3공장(중신징청) 앞 모습. 베이징/최현준 특파원

중국이 버티기 전략을 쓰는 가운데 신기술 개발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지난해 3월 중국 통신장비 회사 화웨이는 14나노 이상 반도체를 설계할 때 쓰는 ‘전자디자인자동화’(EDA) 개발에 성공한 데 이어, 8월에는 7나노 칩을 탑재한 프리미엄 스마트폰을 출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의 수출 통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수율은 낮지만 중신궈지가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 전에 확보한 장비를 활용해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은 최근 중신궈지가 7나노에서 한발 더 나아가 5나노 반도체 생산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전했다.

시가총액 2조달러를 넘는 등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 중 하나로 떠오른 미국 엔비디아는 지난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2023년 연간 보고서에서 경쟁 회사 중 하나로 중국 화웨이를 적시했다.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중앙처리장치(CPU), 네트워킹 칩 등 인공지능(AI)용으로 설계된 칩을 공급하는 데 있어 강력한 경쟁자라는 것이다.

베이징/최현준 특파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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