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 사막 위 TSMC-인텔 ‘반도체 대격돌’ [현장]

옥기원 기자 2024. 3. 1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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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지경학, 칩 왕좌의 게임(상)
차로 1시간 거리에 공장 두 곳
내년 완공·가동 목표 건설 분주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북부 지역에 대만 파운드리 기업인 티에스엠시(TSMC)의 첨단 반도체 공장이 건설되고 있다. 사진은 골격 공사가 진행 중인 2공장으로, 완공 시점이 2027년 이후로 연기됐다.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도심을 벗어나 선인장이 듬성듬성 서 있는 광활한 사막을 자동차로 30분 넘게 달리니 은색 외형의 공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막 한복판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티에스엠시(TSMC) 로고가 붙은 1공장은 외장 공사가 마무리 단계였고, 바로 옆 2공장은 철근 골격을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공장 주변은 일본 반도체 장비업체인 도쿄일렉트론(TEL) 차량과 수십대의 공사 장비, 헬멧을 쓴 공사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진 찍지 마!”

지난달 23일(현지시각) 애리조나주 피닉스 북부 티에스엠시 공장 진입로에서 스마트폰으로 건물 사진을 찍으려 하자 덩치 큰 경비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경비원은 “‘보안 시설’이라서 허락 없이 사진을 찍으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며 고성을 질렀다. 취재 차량이 공사장 주변을 벗어날 때까지 경비원이 뒤를 따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공장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의 한 주차장에서 만난, 대만에서 파견 온 티에스엠시 직원은 “공장 내부 상황을 외부인에게 말하는 게 금지됐다. 첨단 반도체가 생산될 시설이고, 최근 공사까지 계속 지연돼 보안이 더 강화됐다”고 말했다.

반도체 두 공룡의 애리조나 전쟁

티에스엠시 애리조나 팹(FAB·반도체 공장)은 내년 이후 미국에서 가장 고성능 반도체가 생산될 공장이다. 동아시아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시설을 미국으로 옮기기 위해 미국 정부는 티에스엠시에 수십억달러 보조금(설비 투자액 약 15%+ 세제 혜택)을 약속하며 유치에 공을 들였다. 티에스엠시는 애리조나 공장 설비 건설에 40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피닉스 북부에 우선 확보한 부지만 약 456만㎡로 축구장 면적(7140㎡) 638개에 이른다. 6개 이상 팹 라인을 건설할 수 있는 크기다. 주변이 사막지대인 비개발 지역이라서 공장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북부 지역에 대만 파운드리 기업인 티에스엠시(TSMC)의 첨단 반도체 공장이 건설되고 있다. 사진은 1공장의 모습으로, 외형 공사가 마무리 단계다.

2022년 12월에 열린 애리조나 팹 기공식에 참석한 인물들을 보면 티에스엠시가 미국 산업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 잘 드러난다.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애플의 팀 쿡, 엔비디아의 젠슨 황, 에이엠디(AMD)의 리사 수 최고경영자 등 미국 정치·경제계 거물급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애플·엔비디아 등 미국의 정보기술(IT) 기업들은 티에스엠시가 공장을 멈추면 첨단 제품을 생산하기 어렵다. 바이든은 이날 연설에서 손가락 3개를 펴며 “이 공장에서 최첨단 3나노미터(회로 선폭이 10억분의 3미터) 반도체가 생산될 것”이라고 했고, 팀 쿡은 “애플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 도장이 찍힌 반도체를 쓰겠다”고 공언했다. 반도체 지경학 시대가 본격화됐음을 알린 장면이다.

애리조나 팹은 사실상 티에스엠시가 대만 바깥에 만드는 첫 첨단 공정 시설이다. 그동안 티에스엠시는 첨단 칩의 대만 양산 원칙을 고수했다. 지난달 말 완공된 일본 구마모토 공장에서도 12~28나노미터 구형 칩을 생산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10년 넘게 반도체 장비를 개발한 한동협 재미한인반도체협회 고문(ONUS Solutions 대표)은 “미국 정부의 반도체 리쇼어링(해외 생산공장의 자국 복귀) 정책과 대중국 반도체 규제 흐름뿐 아니라 주요 고객인 미국 애플, 엔비디아, 테슬라 등의 보이지 않는 압력도 티에스엠시와 삼성전자의 미국 공장 건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역시 미국 정부의 구애로 미 중남부 텍사스주 테일러 지역에 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애리조나 챈들러 남부 오코티요 지역에선 미국 대표 반도체 기업 인텔의 최첨단 파운드리 공장도 지어지고 있었다. 티에스엠시 애리조나 팹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거리다. 내년 말 완공 목표인 2개의 공장 주변 타워크레인이 연신 철근 구조물을 나르고 있었다. 300억달러가 투자된 공사다.

애리조나에서 만난 인텔의 한 연구원은 “공장 건설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고, 새 공장에서 빠르면 내년 말부터 1.8나노 칩을 생산하기 위한 작업을 준비 중”이라며 티에스엠시와 치열한 첨단 기술 경쟁을 예고했다. 인텔과 티에스엠시 공장이 완공되면 애리조나는 연간 100만장(TSMC 약 60만장) 안팎의 첨단 웨이퍼가 생산되는 명실상부한 미국 ‘반도체 1번지’가 된다.

인텔은 파운드리 후발주자지만 미국 기업이란 이점이 있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은 지난달 21일 새너제이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포럼’에서 화상 연설을 통해 “이제 반도체를 다시 미국으로 가져올 때다.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 추가적인 ‘반도체 지원법’이 필요하다”며 인텔을 지원사격했다. 인텔 내부에선 미 정부로부터 100억달러 이상의 공장 신축 보조금 및 대출 지원 등을 무난히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미국 애리조나주 챈들러 남부 오코티요 지역에 인텔의 첨단 팹 공장이 건설 중이다. 1공장 완공 시점이 내년 하반기로 예상된다.

탄탄대로 인텔, 삐걱대는 TSMC

인텔과 달리 티에스엠시 애리조나 팹 건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장 건설이 계속해서 늦어지고 있다”는 티에스엠시 직원의 말은 현재 애리조나 팹 상황을 잘 드러낸다. 애초 올해 말 가동될 예정이던 1공장은 내년 하반기로 가동이 연기됐고, 2공장 완공 시점도 2027년 말이나 2028년 초로 미뤄졌다. 애리조나 팹은 최근 완공한 일본 구마모토 공장이 공사 기간을 기존 5년에서 2년으로 단축한 것과는 대조된다.

티에스엠시 공장 건설에 참여한 지역 주민 마이크(가명)씨는 “공장 가동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무리하게 작업을 진행해 (사망) 사고까지 발생했다”고 증언했다. 전기 배선 관련 기술자인 그는 “초과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다. 안전규칙도 없이 무리하게 일을 시켜 작업자들의 불만이 컸다. 추락 사고 사망자도 있었고, 공사 현장 환기장치가 없어 호흡기 문제를 겪은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티에스엠시가 “숙련된 현지 인력이 부족하다”며 대만에서 수백명 인력을 데려오려 한 시도는 애리조나 건설노동조합과 갈등에 불을 지폈다. 현지 노조는 티에스엠시가 해외 싼 인력을 쓰기 위한 핑계를 대고 있다며 주 정부와 의회에 비자 발급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노사 갈등은 미국인을 우선적으로 채용하고 작업장 안전 교육 등을 강화하는 쪽으로 일단락됐지만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아 있다. 마이크씨는 “티에스엠시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칩 생산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경험한 노동 환경은 최악이었다. 아시아에서처럼 장시간 노동과 강압적인 문화를 강요한다면 미국 공장은 잘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공사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티에스엠시가 올해 11월 초 미국 대선에 맞춰 팹 공사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는 해석도 나온다.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국외 기업 유치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기보다 자국 기업을 육성하는 쪽으로 반도체 지원법의 방향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인텔의 한 연구원은 “애리조나는 전통적으로 보수 공화당이 강세인 지역으로 외국 기업(TSMC)에 큰 보조금을 지급하는 건 자칫 현 바이든 정권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보조금을) 주더라도 정치적으로 납득할 만한 조건이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치적 변수에 따라 티에스엠시의 공장 운영 계획도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애리조나의 투자 지원 단체인 ‘그레이터 피닉스 경제 위원회’(GPEC)의 토머스 메이너드 부사장은 지난달 22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첨단 팹 건설은 매우 다양한 논의가 필요한 복잡한 프로젝트다. 건설 초기 다양한 문제로 약간의 지연이 있었지만, 지금은 빠르게 공장을 건설, 가동하는 것을 목표로 기업과 주 정부 모두 움직이고 있다. 티에스엠시 1공장은 내년에 무리 없이 칩 생산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티에스엠시(TSMC) 애리조나 팹이 들어설 피닉스 북부 외곽에 새로운 주택단지들이 건설되고 있다. 사진은 애리조나 팹 인근 앰버힐스 주택가.

대형 팹 유치로 지역 경제는 ‘반짝’

티에스엠시와 인텔의 새 공장 건설로 애리조나 지역 경제도 살아나는 분위기다. 티에스엠시 공장이 있는 피닉스 북부와 인텔 공장이 들어설 챈들러 남부를 가로지르는 대형 도로 건설 작업이 한창이었고, 주변에 협력사로 보이는 공장 단지들도 건설되고 있었다. 대형 반도체 패키징 기업 앰코도 20억달러를 들여 애리조나에 패키징 공장을 짓기로 했다. 그레이터 피닉스 경제 위원회는 인텔과 티에스엠시 애리조나 팹 건설로 약 30개의 협력사가 현지에 공장 이전 및 확장을 결정했고, 중장기적으로 2만개가 넘는 신규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족 이주까지 고려하면 약 6만명의 인구 증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인력 유입이 예상되면서 애리조나 도심 외곽지역에도 새 주택단지들이 대거 들어서고 있다. 현지 주민인 피터 에이든씨는 “고소득 전문직들이 사는 피닉스 지역 주택은 2년 전과 비교해 월세가 2배 이상 뛰었다”고 말했다.

피닉스(애리조나)/글·사진 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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