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51] 인류세는 죽지 않았다
2000년 2월,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서 열린 학회에서 과학자들은 홀로세의 지질학적 특성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때, 화학물질에 의한 오존층 감소를 밝힌 공으로 1995년 노벨상을 받아 유명해진 파울 크뤼첸(Paul Crutzen)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우리는 홀로세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인류세(Anthropocene)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서 인류가 지구의 대기와 지각을 바꾸고 있다는 뜻이었다.
크뤼첸의 지인은 그에게 ‘인류세’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 글을 남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자신보다 한참 먼저 인류세라는 말을 쓴 사람이 있었다. 호수의 부영양화를 연구하던 미국의 수(水)생태학자 유진 스토머(Eugene Stoermer)가 1980년부터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스토머에게 연락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둘의 공동 이름으로 ‘인류세’라는 짧은 논문을 발표했다. 2년 뒤, 크뤼첸은 ‘네이처’지에 인류세에 대한 단독 논문을 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류세를 홍보했다.
이렇게 해서 인류세라는 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는 기후 위기와 맞물리면서 큰 반향을 낳았다. 인간이 만든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평균 온도를 1도 올려서 빙하와 만년설을 녹이고, 인간의 분탕질에 맞선 자연의 역습은 거세졌다. 과학자 린 마굴리스나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이제 자연 보호 대신에 인간 보호, 혹은 인류 보호를 외쳐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지난주 국제지질학연맹 산하 층서소위원회는 지금이 홀로세를 넘어선 인류세라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심의했다. 그렇지만 위원의 다수는 1950년대 이후가 인류세라는 제안에 설득력이 없다고 부결표를 던졌다. ‘사이언스’지는 “인류세가 죽었다. 인류세 만세”라는 제목의 논평을 실었고, 많은 이가 표결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렇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미 인류세는 상식이 되었고, 그 영향력은 더 커질 것이다. 인류세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인류세 만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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