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들린다”는 87세 고객에 ‘이해했다’ 대답 강요… 당국은 뭐했나 비판도

정순구 기자 2024. 3. 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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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은행의 직원은 창구를 찾은 87세 고객에게 무리하게 홍콩H지수 기초 주가연계증권(ELS) 가입을 권유했다.

김미영 금감원 부원장보는 "은행은 고객 이해도를 고려하지 않고 A부터 Z까지 단순히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중들은 은행에서 판매하는 상품을 대부분 원리금 보장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원금 손실 위험이 큰 상품을 은행에서 판매하게 허용해준 것 자체가 금융당국의 책임"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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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ELS 손실 배상]
은행-증권사 불완전판매 실태
‘원금보존’ 희망 투자자에도 팔고… 서류 변조해 배우자 명의 가입도
“은행 판매 허용한 당국에도 책임”
동아DB
A은행의 직원은 창구를 찾은 87세 고객에게 무리하게 홍콩H지수 기초 주가연계증권(ELS) 가입을 권유했다. 고령에 청력이 약한 고객은 “들리지도 않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얘기했지만 이 직원은 “이해했다”고 답할 것을 반복해서 요청했다.

B은행 직원은 투자자에게 주가연계신탁(ELT) 가입을 권유했지만 은행 방문이 어렵다고 하자 자신이 가입신청서 등에 대신 서명해 가입 절차를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직원이 고객 역할을 하면서 녹취도 허위로 진행했다.

금융감독원이 홍콩 H지수 ELS를 판매한 11개사를 대상으로 두 달 동안 실시한 현장 검사에서 위와 같은 은행·증권사의 불완전판매가 대거 적발됐다. 과도하게 책정된 영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사적으로 무리한 판매를 독려하면서 투자자 피해가 커진 것이다. 금융회사의 불완전판매를 막지 못한 금융당국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청력 나쁜 노인에게 “이해했다” 강요

판매사들은 과한 영업 목표를 설정하면서 소비자 보호에는 소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C은행은 2021년 영업 목표를 수립할 때 신탁 수수료 목표를 전년 예상 실적 대비 56.9% 상향해 전사적 판매를 독려했다. 반면 상품 선정 등을 하는 비예금상품위원회는 형식적으로 운영하고 모니터링 등 사후 관리도 미흡했다.

판매 시스템도 부적정하게 설계, 운영됐다. D증권은 ‘원금 보존’을 희망하는 투자자도 소득수준 등 다른 항목 평가 결과에 따라 고위험 상품인 ELS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E은행은 ELS 손실위험 분석 기간을 20년에서 10년으로 임의 변경해 2008년 금융위기 당시의 손실을 반영하지 않았다. 영업점에도 ‘과거 10년간 원금 손실 전무’ 등 안전 상품인 것처럼 설명하도록 유도했다.

개별 영업점에서는 적합성 원칙을 위반하거나 서류 변조 등의 불완전판매가 속출했다. F은행 직원은 배우자 대신 방문한 고객에게 ELS 재가입을 권유하며 명의인인 배우자의 가입 의사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기존에 제출돼 유효기간이 지난 가족관계증명서 발급 일자를 변조해 가입 절차를 진행했다.

김미영 금감원 부원장보는 “은행은 고객 이해도를 고려하지 않고 A부터 Z까지 단순히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 금융당국 ‘책임론’도

금융당국 또한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판매사에 멍석을 깔아주고선 관리 감독은 뒷전으로 미룬 채 대규모 손실을 방기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2019년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태 직후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고 원금 20% 이상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상품을 은행에서 취급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은행의 지속된 요구에 ELS 신탁 판매를 재허용해줬고 결국 홍콩 ELS 사태로 이어졌다. 은행권의 배상 리스크는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최근 국내 은행의 신용등급 전망을 낮추는 계기가 됐다.

은행에 ‘팔 비틀기’식 배상을 강요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금융투자의 자기책임 원칙을 무력화하면서 “투자 손실은 정부가 나서서 물어줄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중들은 은행에서 판매하는 상품을 대부분 원리금 보장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원금 손실 위험이 큰 상품을 은행에서 판매하게 허용해준 것 자체가 금융당국의 책임”이라고 꼬집었다.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강우석 기자 ws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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