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사기꾼이 살기 좋은 나라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2024. 3. 12.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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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나는 전세사기 피해자다. '빌라왕'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지난해 1월, 불안한 마음에 등기부등본을 열람해보니 집은 가압류돼 있고 임대인이 반환하지 못해 보증보험에서 대위변제 해준 채권액만 무려 49억원이었다. 전형적인 갭투자 전세사기범으로 보유주택만 170여채라고 했다. 이사 와서 잘살고 있는 중에 집주인이 바뀐 건데 나로서는 사기범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나한테도 이런 일이 닥치는구나. 눈앞이 캄캄했다. 만기까지 1년도 더 남았지만 곧장 전세금 반환소송을 걸었다. 6개월 만인 7월에 승소판결을 받아 집행권원을 확보했다. 강제경매를 신청했고 해를 넘겨서야 매각기일이 잡혔다. 이제 다음주면 길고 캄캄하던 전세사기 터널의 끝이 보일 듯하다. 내가 살던 집을 직접 경매로 낙찰받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소송비용이 만만찮다. 시간도 많이 뺏겼다. 무엇보다 마음이 심란했다. 앞일을 모르는 것만큼 사람을 괴롭히는 게 없다. 신경 쓸 일이 많고 신경 안 써도 될 일마저 신경 쓰였다. 압류, 가압류, 당해세, 경락대출, 배당기일, 조세채권안분, 보정료, 입찰보증금 등 생경한 언어들에 파묻혀 지내느라 내 글을 못 썼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전세사기 당한 사실을 말했다.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학생이 있다면 내 경험이 참고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전세사기는 주로 사회초년생들을 겨냥한다.

지난해 전세사기특별법이 시행됐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실효성은 거의 없다. 내 경우 행운인지 불운인지 특별법에서 요구하는 모든 피해조건을 다 갖춘 까닭에 전세사기 피해자 결정통지를 받았다. 나처럼 국토교통부로부터 인정받은 피해자가 될 경우 여러 지원 및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 사실의 객관적 증빙이 쉽지 않고 요구하는 기준 또한 까다로워 피해자 인정을 받기가 좀처럼 어렵다. 전세사기를 당해도 피해자로 결정되지 않으면 특별법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급하게 대충 만들어놓고 나 몰라라"하는 게 특별법이다. 지난해 여름 개소된 전세피해지원센터에 피해지원에 관해 물어보면 뉴스 보도자료 수준의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한다. 담당자들이 관련 내용을 모른 채 "국민신문고에 물어보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는다. 전세사기 피해자 전용 디딤돌대출을 운영하는 주택도시기금도 마찬가지다. 주택도시기금에 문의하면 은행에 물어보라 하고 은행에 물어보면 주택도시기금에 문의하라 한다. 대출안내문에는 피해주택을 직접 낙찰받을 경우 낙찰가의 100%를 대출해준다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소액임차보증금을 공제한 80%가 최대 한도다. 결국 보증금 대신 피해주택을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하려 해도 또 빚을 내야만 한다. 지난해 6월 피해자 전용 대출이 나왔지만 여태 이용자가 없다. 있으나 마나 한 대책인 것이다.

임대인이 체납한 국세, 지방세보다 임차인의 보증금을 먼저 보호해주는 우선변제권에도 허점이 있다. 증액 재계약을 해 확정일자를 새로 받은 경우 새 확정일자보다 앞서는 국세, 지방세는 국가가 가져간다. 내 경우 재계약하면서 증액한 500만원보다 기일이 빠른 당해세가 있어 피 같은 생돈 500만원을 그냥 날리게 생겼다. 사기꾼들이 활개치며 수십 억, 수백 억원씩 세금을 체납할 동안 국가는 수수방관해놓고 이제 와서 그 돈을 피해자들에게서 뜯어간다. 국가도 한통속 같다.

그래도 그만한 게 어디냐고 생각하면 씁쓸하다. 돈을 주고 일정 기간 동안 집을 빌린다. 기간이 만료되면 집을 비우고 돈을 돌려받는다. 이 간단하고 당연한 원리마저 작동하지 않는 게 대한민국이다. 부동산에 있어서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후진국이다. 그나마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슬프다. 이 엉망진창 특별법의 혜택마저 받지 못하고 이미 보증금을 다 날려서는 스스로 생을 저버린 분들의 억울함은 풀 길이 없다. 피해자 지원도 엉터리고 가해자 처벌도 느슨하다. 대한민국은 사기꾼이 살기 좋은 나라인가.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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