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대도서관] 위험한 적응

2024. 3. 1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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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가 100m를 전력 질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이다.

나무늘보가 하루에 먹는 양은 나뭇잎 3장.

나무늘보의 느림은 생존을 위한 독특한 진화다.

나무늘보의 천적은 오히려 그들 삶의 토대인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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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 시대 속 오늘의 적응이 내일 담보 못 해
맹목적 적응, 도태 불러 변화시킬 능력 가져야
나무늘보가 100m를 전력 질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이다. 이렇게 느린 이유는 근육량이 적기 때문이다. 근육량이 적으니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적고 소화되는 속도가 느리니 조금만 먹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나무늘보가 하루에 먹는 양은 나뭇잎 3장. 만들 수 있는 에너지가 거의 없으니 에너지 사용을 극도로 낮추는 편을 택한 것인데, 이렇듯 안 움직인 결과 눈에 잘 띄지 않는 개체가 되어 생각보다 천적은 많지 않은 편이다. 나무늘보의 느림은 생존을 위한 독특한 진화다.

나무늘보의 천적은 오히려 그들 삶의 토대인 나무다. 일반적으로 나무 한 그루당 한 마리의 나무늘보가 서식한다. 기왕이면 튼튼하고 약초 효능이 있는 나무가 선호되는 까닭에 나무늘보들 사이에선 나무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의 서식지이자 보호막인 정글이 여러 요인으로 인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발 빠른 동물들은 근처의 다른 정글로 옮겨 갈 수 있지만 워낙 느린 나무늘보는 그럴 수도 없다. 지금까지 그들을 살아남게 한 극단적 적응은 달라진 환경에서 그들의 생존을 방해하는 극단적 부적응의 원인이다. 매일 변하는 세계에선 오늘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해서 내일도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우리 삶을 보존하는 데 유용한 건 어떤 태도일까.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그의 저서 ‘난파선과 구경꾼’에서 “제3자인 구경꾼 입장”을 자기 보존에 필요한 안전한 거리라고 말한다. 문학적, 철학적 문서들에서 인생을 난파와 항해에 비유한 대목을 찾고 난파를 바라보는 구경꾼에게서 심미적, 윤리적 가치를 발견하는 이 책에는 ‘구경꾼 입장’을 옹호하는 다양한 관점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구경꾼 옹호자’가 몽테뉴다. 그는 구경꾼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을 “능력”이라 칭한다. 거리를 유지할 능력 덕분에 단단한 해변에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세적 성공은 가져다주지 않지만 삶이 위험에 처하는 걸 피하게 해 주고 그 거리감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서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구경꾼이라면 그런 구경꾼은 비윤리적이다. 여기서 구경꾼은 고통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관계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철학자와 현실의 관계를 말한다. 구경꾼이 되어 세계 바깥에 자리 잡는 사람들을 저자는 철학자라 부른다. 구경꾼이 되는 것을 철학자의 태도라 말하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한편, 나는 그들의 위치가 세계의 바깥이라는 것에는 생각을 달리한다. 구경꾼은 거리에서 생겨나는 여유와 깊이 있는 시선을 통해 세계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역설적 능력의 소유자다. 그들은 적응과 부적응이라는 기존의 프레임에 적용받지 않고 프레임 자체를 이용함으로써 사태의 본질과 근원에 접근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다.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시대일수록 맹목적 적응은 도태와 멸종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우리의 삶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것은 구경꾼의 태도가 아니라 구경꾼으로서의 태도를 이용해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유도하는 능력이다. 그 깊이와 여유의 태도가 지금 필요한 진짜 능력이다.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법을 택한 나무늘보의 진화는 느림의 미학이라고 미화되어 온 측면이 없지 않다. 적응을 경계해야 한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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