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 피의자는 ‘사법정의 실현’ 이유로 출국금지, 이종섭만 예외?
법무부가 ‘채 상병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출국금지를 속전속결로 해제해 준 것을 놓고 최근 법원 판결들과 배치되는 이례적인 조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3년간 법원 판결을 분석한 결과 고위공직자가 아닌 일반인의 경우 수사받는 피의자가 출국금지 위법성을 주장해도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법조계에선 법무부의 이 전 장관 출국금지 해제가 형평성도 없고 수사 회피 의도가 큰 이례적 결정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11일 경향신문이 지난 3년간 출국금지 대상자가 법무부를 상대로 낸 불복 소송(취소소송) 중 확정된 법원 판결 47건을 살펴본 결과, 31건이 기각된 것으로 나타났다.
법무부가 불법 다단계 판매조직 운영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던 A씨에게 2022년 5~11월 출국금지 조치를 내린 것이 정당하다고 본 판결이 대표적이다. A씨는 수출 계약을 위해 잠시 출국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법무부 장관이 범죄수사를 위해 출국을 정지하도록 하는 것은 수사 받고 있는 사람의 해외 출국을 막아 국가 형벌권을 확보함으로써 사법정의를 실현하고자 함에 있다”고 했다.
해당 재판부는 경찰이 진술 등 여러 정황을 기반으로 범죄를 인지한 점, 불법 다단계는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범죄인 점, 사건 관계자가 다수이고 자금 흐름 추적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했다. 재판부는 “6개월 가량 출국정지가 이뤄졌지만 수사기관이 수사자료를 확보하기 전에 출국정지 처분이 해제돼 원고(A씨)가 출국한다면, 원고가 수사기관의 소환에 불응하거나 증거를 해외로 도피시킬 우려가 있는 등 대한민국의 형벌권 행사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코인 관련 사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은 B씨도 1년10개월 넘게 출국금지를 당해 취소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정당한 출국금지라고 했다. B씨는 “장기간 성실하게 수사에 임했지만 경찰이 범죄혐의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며 출국금지를 해제해달라고 주장했다. 압수수색과 컴퓨터, 휴대전화 포렌식을 마쳤으므로 증거인멸 우려가 없고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가 기각됐다고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출국금지 처분은 수사 필요성이 인정되고 피의자가 출국해 소환에 불응할 우려가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라며 “피의자의 범죄사실과 해외도피 가능성 등이 확정적으로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또 “사건 관계자가 다수이고 자금 흐름 추적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사안의 특성상 장기간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출국금지 취소소송의 대부분은 조세 미납 사례가 많았다. 법원은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 출국금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러 출국금지 당사자들은 ‘투자 유치를 위해 해외 출장이 절실하다’, ‘해외사업 활동이 생업이라 반드시 필요하다’, ‘해외 출장을 간다고 세금을 안 내고 도피하는 게 아니다’라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같은 판결 내용은 법무부가 이 전 장관 출국금지를 해제하며 이유로 댄 것과 배치된다. 앞서 법무부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장기간 이 전 장관 조사를 하지 않았고, 이 전 장관이 수사 협조 의지를 밝힌 점 등을 들어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김대근 한국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출국금지가 오남용 되면 문제가 있지만 (범죄 수사·기소에) 필요한 국가작용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라며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 해제 사유가 납득할 만한지 의문이 들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 큰 혜택을 준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지적했다.
근거없는 출국금지로 취소 판결도..이종섭에만 관대?
법원 판결에서는 법무부가 뚜렷한 근거 없이 출국금지를 연장하다가 법원에서 제동에 걸린 경우(10건)도 적지 않았다. 법무부가 일반인 사건에서는 적극적으로 출국금지를 하는 반면 이 전 장관 사건에서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으로 임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C씨는 컴퓨터 부품 제조·판매업체를 설립했다가 폐업한 뒤 세금을 체납했다. 법무부는 2019년 1월을 시작으로 네 차례 기간을 연장해 총 1년7개월 가량 C씨를 출국금지했다. C씨는 법원 소송 끝에서야 출국금지 위법성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재판에서 법무부 측은 ‘회사 수익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밝혀진 게 없다’, ‘출국을 허용하면 향후 국세 체납액의 강제집행이 어려워질 수 있다’며 유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2심 법원은 법무부와 국세청이 C씨의 은닉 재산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막연한 추측’으로 출국금지를 했다고 판단했다. C씨가 운영하던 회사의 당기순이익이 적자였고, 그가 소유하던 건물도 경매로 넘어가는 등 세금을 낼 여력이 없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과세당국의 강제집행을 곤란하게 할 사정이 있었다고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출국만으로 강제집행이 곤란해질 우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또다른 조세 미납자 D씨는 출국금지가 4년간 연장됐지만 그 기간에 법무부와 국세청이 은닉 재산을 찾아내지 못해 법원이 처분을 취소했다. 1심 재판부는 “(법무부가) 출국금지 기간 연장처분을 할 때마다 재산 해외도피 우려나 출국금지 연장의 필요성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있는지 충분히 검토한 사정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2020년 법무검찰개혁위 “이의신청 받아들여지는 경우 극소수”
법무부의 이 전 장관 출국금지 해제 결정은 통계상으로 봐도 이례적이다. 2020년 6월 법무부 산하 법무·검찰개혁위원회 자료를 보면, 2019년 기준 1만1202명이 출국금지됐는데 수사기관 등의 요청을 법무부가 받아들인 비율은 97.3%에 달했다. 범죄수사를 이유로 한 출국금지의 경우 결정률이 98.8%였다. 수사 중인 피의자에 대해 수사기관이 출국금지를 요청했을 때 100명 중 99명 가량은 요청대로 출국금지가 이뤄지고 1명 정도만 안 된 셈이다. 이런 통계에 따르면 법무부가 공수처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출국금지 해제를 결정한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법무부가 이의신청을 받아들이는 비율은 10~20% 남짓이라고 한다. 개혁위는 출국금지 제도개선 권고의견을 통해 “전체 출국금지 사건 가운데 이의신청이 이뤄지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라며 “설사 이의신청을 하더라도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라고 지적했다. 법률상 범죄수사를 이유로 한 출국금지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피의자 뿐 아니라 참고인까지 출국금지 되는 경우도 문제로 제기됐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수사 목적을 위해 이 전 장관 출국금지를 했는데 그 목적이 달성됐는지에 대해 판단하는 과정이 없었고, 급박하게 해제할 만큼 시급한 사안이었는지도 문제”라며 “법무부가 공수처 수사권을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강연주 기자 pla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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