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스스로 입을 틀어막는다 [뉴스룸에서]
김태규 | 토요판부장
지난달 24일 찾은 대전 카이스트(총장 이광형) 캠퍼스. 봄이 곧 올 거라는 성급한 기대를 비웃듯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휑한 캠퍼스에는 마치 근조 메시지처럼 흰 천에 검은 글씨가 적힌 펼침막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학위수여식 사건에 대한 카이스트의 공식 입장을 촉구한다.”(학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2022년 가을 학기에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에 입학했다. 이날은 2024년 봄학기 개강일. 새벽 기차를 타고 대전에 왔다. 서대전역에서 만나 택시를 함께 타고 온 동기가 비를 맞고 있는 펼침막을 보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 경호처는 생각이 있는 거예요? 얼마 전에 국회의원 그렇게 쫓아냈다가 엄청 욕먹었는데 어떻게 똑같은 짓을 한대요?”
“대통령이 질책했으면 또 했겠어? 대통령이 잘했다고 하고, 흡족해하니까 똑같이 움직인 거겠지.”
이 대학원에선 다섯가지 기술 수업(정보·환경·바이오·나노·융합)을 전공필수로 들어야 한다. 한 과정당 통상 8명의 교수가 3시간씩 강의한다. 전문적인 내용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선진국들이 사활을 걸고 기술 개발에 각축을 벌이고 있는 양상은 분명히 각인된다.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미국의 기술패권이 다르파(DARPA,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로 상징되는 국가적 연구개발 지원에서 비롯됐음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를 추격만 할 게 아니라 선도자가 될 수 있는 혁신적 원천 기술 개발을 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교수들이 많다. 미래 먹거리를 개발하겠다는 공학자의 열정과 애국심이 느껴진다.
외환위기 때도 없었던 국가 연구개발 예산 삭감을 밀어붙이고 2024년 2월의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 나타난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알앤디 예산을 복원하라”는 구호가 나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경호처 직원들은 석사학위를 받아야 할 학생의 입을 틀어막았고 사지를 들어 행사장 밖으로 끌어냈다. 한 학기 일찍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면 내가 참석했을 현장이기도 했다. 당시 학위수여식에 참석했던 이들은 “대통령 축사 중에 갑자기 학생 한명이 일어나 뭐라고 말했다. 행사장이 커서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더라. 누가 싸운 줄 알았다. 사건의 내용은 나중에 기사로 알게 됐다”고 말한다. 강성희 진보당 의원이 윤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근접 거리에서 “국정 기조를 바꾸시라”고 조언한 상황과도 차이가 크다. 신민기씨의 외침은 대통령에게 가닿지도 않았다. 대통령에게 위해가 가해질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상황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대통령실은 신민기씨가 녹색정의당 대전시당 대변인이라는 점을 부각하며 ‘정치적 기획·선동’이라고 역공했다. 그러나 그는 정당인 이전에 학위수여식의 주인공인 카이스트 대학원생이다. 신민기씨가 아닌 다른 졸업생이 예산 삭감에 항의했더라도 똑같이 입을 틀어막고 끌고 나갔을 경호처다. 행사 당일엔 대통령 경호를 위해 좌석 확보가 필요했던지, 학위수여식에 참석하려던 학부모가 입장하지 못하고 진행요원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남의 잔칫집에 찾아와 사달을 낸 대통령실에 구성원들은 분노했다. 재학생과 교수, 직원 4456명은 “명백한 인권침해”라며 대통령실에 사과를 요구했다. 카이스트 동문들도 대통령 경호처장 등을 경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학교 차원의 입장 표명은 없다. 교수협의회 집행부가 추진한 카이스트 교수 전체의 유감 표명도 교수들의 과반 동의를 얻지 못해 ‘없던 일’이 됐다고 한다. 원천 기술을 개발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겠다는 열정과 대통령실의 폭거를 향한 분노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일까. 신민기씨는 “교수님들 역시 문제의식을 많이 갖고 계시지만 제자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하시는 분이 많다”고 ‘선해’했다. 대통령실에 누구보다도 유감을 표명해야 할 학교 쪽도 미동도 않고 있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대통령실이 강성희 의원의 입을 틀어막은 게 지난 1월18일이었고 약 한달 뒤 카이스트에서 신민기씨의 입이 틀어막혔다. 그로부터 또 한달이 다 돼가지만 목소리를 내야 할 이들이 스스로 입을 막았다. 독재화가 진행 중인 이 땅에서 ‘입틀막’ 효과가 뚜렷하다. 흐뭇한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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