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오스카 석권' 크리스토퍼 놀란, 무관의 설움 씻은 원동력은?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다 이 순간을 꿈꿀 겁니다. 너무 오래 이 순간을 바라왔습니다. 실현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 자리에 정말 서게 되었네요. '오펜하이머'가 이렇게 탄생한 건 놀란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천재적인 감독님 감사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제작한 엠마 토마스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거머쥔 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던 꿈'이 실현됐다고 행복해했다. 그녀가 남긴 수상 소감은 남편이자 영화의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속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10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펜하이머'가 작품상과 감독상, 남주우연상(킬리언 머피), 남우조연상(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까지 총 7개의 트로피를 휩쓸었다.
'무관의 제왕'인 크리스토퍼 놀란이 '마침내' 오스카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시상식 최고상인 작품상과 영화 연출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감독상을 동시에 석권했다. 데뷔 26년, 12편의 장편 영화 연출 끝에 이룬 성과다.
놀란은 그동안 아카데미와 지독히도 인연이 없었다. 두 번째 연출작 '메멘토'(2001)로 아카데미 각본상, 편집상 후보에 오르며 오스카 트로피와 손쉽게 인연을 맺는 듯했지만 이는 긴 도전의 시작일 뿐이었다.
국내에서 큰 팬덤을 형성하고 슈퍼 히어로 영화 사상 첫 10억 달러 돌파작의 자리에 올랐던 '다크 나이트'는 남우조연상과 기술 부문 7개 부문 후보에 올라 남우조연상(히스 레저)과 음향편집상을 받는데 만족해야 했다. 국내에서 천만 흥행에 성공했던 '인터스텔라'는 최우수 음악상, 시각효과상, 음향효과상, 미술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돼 시각효과상 하나를 받는데 그쳤다.
그가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등 개인 트로피를 받을 수 있는 상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된 건 '인셉션', '덩케르크', '오펜하이머' 세 편이었다. '인셉션'(2010)은 작품상과 각본상을 포함해 총 8개 부문 후보에 올라 촬영상, 음향상, 음향편집상, 시각효과상 4개 부문을 받았다. '덩케르크'(2020) 역시 작품상, 감독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감독상 후보 첫 지명이었으나 편집상, 음향편집상, 음향효과상을 받는데 그쳤다.
종합하면, 놀란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돌아가는 기술 부문 상은 다수 수상했지만 개인이 트로피를 받을 수 있는 상(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은 총 8차례 후보에 올라 이번에 처음으로 영광을 누렸다. 긴 인내 끝에 맺은 달콤한 열매였다.
◆ '오펜하이머'의 예견된 석권?…놀란, 아카데미 취향 저격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오펜하이머'와 11개 부문 후보에 오른 '가여운 것들'의 2파전으로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오펜하이머'의 압승을 예상했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아카데미 바로미터'로 불리는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크리틱스 초이스 등에서 모두 작품상과 감독상을 석권했다. 그리고 이변 없이 아카데미도 작품상과 감독상을 석권했고, 최다 관왕의 영예까지 안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펜하이머'는 아카데미의 취향을 저격하는 소재와 연출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천재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그린 전기 영화.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불렸던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겪었던 내적 갈등과 딜레마에 초첨을 맞췄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은 원자폭탄으로 세계 제2차 대전을 종식시킨 인물이지만 그가 만든 원자폭탄은 일본의 수십만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영화는 '위대한 미국'의 우월감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죽음의 신'이라 불렀던 한 인물의 내적 갈등을 통해 반전 메시지를 피력한다. 드라마틱한 실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실존 인물, 명확한 메시지라는 삼박자가 어우러진 작품인 데다 시네마의 위엄을 보여준 극장용 영화라는 것도 아카데미 회원들의 압도적 투표를 예상하게 하는 지점이었다.
올해 아카데미는 수작이 넘쳤다. 작품의 수준뿐만 아니라 전 부문 다인종 후보가 오른 첫 번째 해였다. 특히 영화 소재의 다양성이 어느 해보다 두드러졌다. 페미니즘을 소재로 한 영화 '가여운 것들'과 '바비', 아메리칸 원주민의 비극을 다룬 '플라워 킬링 문', 프랑스에서 온 수작 법정물 '추락의 해부', 한국과 미국이 합작한 이민자 서사의 '패스트 라이브즈'도 작품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미국의 폐부를 찌른 '플라워 킬링 문'으로 뉴욕비평가협회 작품상을 거머쥐며 '오펜하이머'를 견제했지만 아카데미까지 그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 작품은 미국의 부끄러운 역사를 파헤친 문제작으로 거론되며 아카데미 위원들의 외면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가여운 것들'도 골든글로브 시상식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받으며 막판까지 따라붙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가여운 것들'에서 자신의 역량을 집대성하는 노련한 연출을 보여줬고, 엠마 스톤은 그야말로 도전적인 연기로 벨라 벡스터의 모험을 스크린에 펼쳐 보였지만 이 진취적이고 파격적인 우화는 다수의 회원을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카데미는 로컬 시상식이며 칸, 베니스, 베를린 등 국제 영화제와는 다른 기준으로 수상자(작)가 탄생한다. 10명 이내의 소수의 영화인이 심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천 명의 영화 관계자들이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시상식을 주관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수년 전부터 백인 중장년층 위주의 회원을 개편해 다인종, 다국가의 신규 회원을 늘리고 성별 균형을 맞추는 등 변화를 감행했다. 그러나 여전히 투표권이 있는 회원들 중 백인 남성의 비율이 가장 높다.
또한 오스카 레이스는 스튜디오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홍보전이기도 하다. 반드시 작품성이 가장 뛰어난 영화가 상을 받은 것은 아니며, 적지 않은 외부적 요소들이 투표의 향방에 영향을 끼친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수작이다. 놀란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자신의 한계로 지적받았던 것들을 극복해 내며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놀란 감독은 매 작품 관객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영화들을 만들어왔지만 기술적 완성도에만 집중하는 감독이라는 시선도 받아왔다. 관객의 두뇌를 자극할지언정 가슴을 울리지는 못한다는 평가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달랐다.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총성이 울리고 있는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화두를 던졌다.
또한 '시간의 분해'라는 놀란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철학은 이번 작품에서 컬러와 흑백 화면의 전환으로 극대화됐다. 극 중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시점은 컬러로,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비롯한 다른 인물의 회고는 흑백 영상으로 등장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놀란 감독은 65mm 흑백 IMAX 필름을 직접 제작해 촬영을 진행했다. 이러한 기술적 실험이 이야기와 만나 파급효과를 낼 때 영화는 예술성을 획득한다.
◆ 킬리언 머피X로다주, 마침내 인정받은 '찐' 실력파 배우
올해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 결과도 흥미로웠다. 남녀주연상에 킬리언 머피('오펜하이머')와 엠마 스톤('가여운 것들'), 남녀조연상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더바인 조이 랜돌프('바튼 아카데미')까지 모두 받을 사람이 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오펜하이머'는 연기상 부문에서도 두 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킬리언 머피와 남우조연상을 받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모두 첫 수상이었다.
아일랜드 출신인 킬리언 머피는 2005년 '배트맨 비긴즈'로 크리스토퍼 놀란과 인연을 맺어 '다크 나이트', '인센셥', '다크 나이크 라이즈', '덩케르크', '오펜하이머'에 연이어 출연한 '놀란의 페르소나'다. 놀란 감독의 영화에서 기억나는 주연 배우는 크리스찬 베일이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고 할 수 있지만 출연 빈도로 보면 킬리언 머피가 단연 앞선다. 다만 그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조연으로 활약했다.
'오펜하이머'는 놀란이 머피에게 제안한 첫 타이틀롤이며 한 인물의 복잡다단한 딜레마를 표현하는, 배우로서는 거절하기 힘든 매력을 지닌 캐릭터였다. 그는 대본도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다. 마티니와 담배를 달고 살며 수척한 외형을 지녔던 실존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하루에 아몬드 한 알만 먹으면서 체중을 감량했다는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킬리언 머피는 발성과 발음, 감정 표현 등 기본기가 탄탄한 배우기도 하지만 사파이어 색깔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하면서도 신비로운 아우라가 경이롭다. 영화의 첫 장면을 묘사한 각본집에도 그의 눈빛이 주는 위력에 대한 표현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휘몰아치는 플라스마가 팽창하며 발 구르는 소리가 강박적으로 커진다. 그 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한 얼굴이 나타난다. 수척하고 긴장된 얼굴. 눈을 꽉 감고 있다. 그 얼굴이 소스라치면서 눈을 뜨자 소리가 멈춘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의 눈."
그는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메소드 연기에 가깝게 표현해 내며 필모그래피 사상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
킬리언 머피는 매력과 역량에 비해 과소평가되어 온 배우기도 하다. 1996년 연극 '디스코 피그'로 데뷔해 대니 보일 감독의 좀비물 '28일 후'(2003)에서 활약하며 주목받았다. 이후 영국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아일랜드 거장 닐 조던 감독의 '플루토에서의 아침을'(2007) 등에 출연하며 국제무대에 눈도장을 찍었다. 놀란 감독의 영화를 제외하면 예술 영화에서 활약하는 배우의 이미지가 강했던 킬리언 머피는 2013년 영국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범죄조직을 이끄는 토미 쉘비를 연기해 전 세계적인 사랑을 얻기도 했다.
영화 '오펜하이머'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킬리언 머피는 "(놀란 감독과 함께 한) 20년을 통틀어 가장 만족스러운 영화였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라고 놀란에게 영광을 돌렸다. 이어 "좋든 나쁘든, 우리는 지금 원자폭탄을 개발한 사람이 만든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 상을 전 세계에서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이며 영화의 메시지에 힘을 싣는 소감을 남겼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남우조연상 수상도 감동을 선사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28살이었던 1993년, 영화 '채플린'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트로피는 '여인의 향기'의 알 파치노에게 넘어갔지만 '채플린'에서의 찰리 채플린 연기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후 그는 마약 중독으로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허비했다. 그런 그를 구원해 것은 영화와 사랑이었다. 그는 2008년 '아이언맨'으로 재기해 세계적인 흥행 배우로 도약했고, 수잔 다우니도 만나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
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끝으로 '아이언맨' 수트를 벗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비현실적 영웅이 아닌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기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와 박찬욱 감독의 시리즈 '동조자'가 그러한 행보의 첫 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날 시상식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나의 혹독한 유년 시절에 감사한다"며 마약으로 허비했던 30대 시절에 오히려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최근 인터뷰에서 1993년에 오스카를 받지 못한 것을 "다행"이라고 말하며 "(당시) 저는 젊었고 정신이 나가있었거든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올바르게 가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라고 답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ebada@sbs.co.kr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각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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