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하야 외친 고교생은 백발에도 촛불을 들었다

한겨레 2024. 3. 1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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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이어 유신반대·광주항쟁 현장 함께
구속·고문·해직 이겨낸 이홍길 전남대 교수

[가신이의 발자취] 민주화 운동의 큰 별, 이홍길 교수를 기리며

지난 5일 오전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고 이홍길 교수의 노제에서 고인의 친구이자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조사를 낭독하고 있다. 필자 제공

겨울 공화국 한복판에 꽃들이 서릿발에 움츠리고 있는 가운데 민주화의 큰 별 이홍길 전남대 명예교수가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노령산맥 따라 의병과 동학 농민군들을 환영하는 봉홧불이 활활 타올랐던 ‘고구마 투쟁’으로 유명한 전남 함평에서 1942년 출생했다. 농사를 짓던 부모는 광복 이후 좌우익 대립이 격화하면서 목포로 이사를 갔다. 초·중학교를 목포에서 졸업한 뒤 광주고로 진학했다.

광주고 2학년 때 민주화 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60년 2월 말 광주 충장로 골목길에서 정치깡패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하여 장면을 친일파라고 모함하는 전단지를 보고 분노한 동창 3명이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은 학교를 간섭하지 말라’며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시내 곳곳에 붙였다. 이러한 행동이 고인의 가슴을 불태우면서 급기야 그해 1960년 3∙15부정선거를 통해서 재집권을 시도한 이승만 대통령을 강력히 규탄하기로 했다.

4월18일 광주고 동창들과 조선대부속고에 재학 중이던 12명과 함께 자취방에서 ‘의거’를 모의하고 시위를 벌이기로 했지만 교장이 눈치채고 학생들을 통제했다. 그러나 의거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모여 경찰이 지키던 교문을 박차고 시내로 나갔다. 거리거리마다 “이승만 하야”를 외치며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고인은 이후 수배가 되어 피신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결국 광주 4∙19혁명의 주동자로 불구속 입건되면서 고인이 민주주의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계기가 된 것이다.

광주4∙19혁명, 한일협정 반대 시위
교육지표 사건 등 현대사의 산증인
5∙18 수습위원 참여로 고문받기도
퇴임 뒤 ​5∙18기념재단 이사장 등
광주전남 시민사회단체 원로 활동

정의롭고 관용하여 함께 가자던
민주주의 거목이자 사학계 큰 어른

1964년 3월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정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은 뒤 박석무(현 다산연구소 이사장)와 함께 ‘한일문제연구회’를 결성했다. 치열한 토론을 거쳐 1965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6∙3 한일협정’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이 선포되고 한일협정은 타결되었고, 고인은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1969년 전남대 사학과 교수로 임용된다. 1978년 봄 송기숙 전남대 국문과 교수가 민주선언을 제안해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선언에 동참하기로 약속했다. 전국적으로 함께 선언하기가 힘든 상황이 되자 1978년 6월27일 고인을 비롯한 전남대 교수 11명의 이름으로 된 ‘우리교육지표 선언’ 성명서를 외국 언론에 먼저 보냈다. 유신체제 교육을 반대하고 민주교육을 실천하자는 내용으로 이른바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해직된 뒤 고인은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복직되어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 학살 현장에서 민간 수습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결국 구속 수감되어 고문을 받는 등 신군부의 탄압을 받았다. 고인은 이처럼 유신의 끝자락에서 저항으로 광주 민중항쟁의 씨앗이 되었다.

419혁명 최초 논의장소 기념석 제막식에서 장헌권(왼쪽) 목사와 함께 기념촬영하는 고 이홍길 교수. 필자 제공

2004년 명예교수로 퇴임한 뒤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 활동을 시작으로 2006년 5∙18기념재단 제8대 이사장, 2009년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초대 상임대표, 사단법인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 등 시민사회단체 원로로 활동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하여 촛불이 들불처럼 타올랐던 촛불혁명 때는 추운 겨울에도 백발이 된 이홍길 교수는 늘 함께했다.

늦게 암을 발견한 뒤 투병 중에도 지리산 피아골에 거주하면서 윤석열 검찰 독재와 민생 파탄, 특히 전쟁 위기의 가운데에 있는 나라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시간들이 많았다.

우리는 고인이 된 이홍길 교수를 사회운동가, 시민운동가, 민주화 운동가이자 사학계의 큰 어른, 민주화 운동의 큰 별, 민주주의 거목,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부른다. 이처럼 그분의 몸에서 민주주의 냄새가 난다. 특히 고인은 늘 책을 벗으로 삼고 “책을 읽어야 하늘이 보이고 땅을 제대로 밟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필자와 책방에서 자주 뵙게 될 때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이야기들로 가슴을 적신다’라는 연재 글에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자녀들의 어머니, 오월 어머니, 조선 시대 어머니 등 섬세한 어머니의 마음과 “더불어 정의롭고 관용하여 함께 가자”며 언제나 소년처럼 맑은 영혼과 따뜻한 가슴으로 살았던 민주화 운동의 동지다.

2011년 민주가족합동세배 행사에서 이홍길 상임대표가 덕담하고 있다. 필자 제공

남편으로,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평범하게 살면서도 역사와 학문을 중시한 영원한 남녘땅 광주의 위인이다. 저서인 ‘큰 분노와 작은 몸짓’을 통해서 역사적 전환기에 지식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깊은 성찰을 담아냈다. 공저인 ‘오뇌와 우정의 60년’과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 ‘호적 연구’가 있다.

시대의 지성인이며 행동하는 역사학자로서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이홍길 교수님,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늘 곁에서 용기와 큰 힘이 되어주셔서 고맙고 사랑합니다. 이제 부활의 꽃으로 빛고을에 활짝 피어나는 역사의 새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역사의 좌표를 만들어준 그 길, 저희들이 감당하겠습니다.

장헌권 목사·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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