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신까지 덮친 교사→사교육업체 '문항 팔이'…대입 공정성 치명타

김정현 기자 2024. 3. 1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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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맞춰지는 '23 수능 영어 23번 판박이 논란
EBS 보안서약 어기고 감수한 지문 출제한 교수
평가원도 직격…"이의심사서 제외하기로 공모"
학원에 지문 판 교사-EBS 집필 교사 '유착 의심'
사교육에 팔았던 문제 내신에 출제했던 교사도
[서울=뉴시스] EBS교재·사설 모의고사와 판박이 논란이 빚어졌던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영어 23번 문항은 현직 교사와 학원 강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간 유착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그래픽=안지혜 기자) hokma@newsis.com


[세종=뉴시스]김정현 기자 = 현직 교사들이 조직적으로 사교육 업체에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과 내신 예상 문제를 사고 판 사실이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되면서 대학 입시 전반의 공정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사설 모의고사 판박이' 논란이 있던 수능 문제의 유착 의혹은 수사가 더 필요해 보이지만, 적어도 출제당국의 관리 부실 책임을 피해 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부 교사들은 자신이 학원과 거래했던 문제를 그대로 내신 시험에 출제하는 등 심각한 도덕적 해이도 드러났다.

11일 입시 전문가들은 사설 모의고사와 지문이 겹쳐 '판박이 논란'이 일었던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에 대한 감사원 감사 결과를 두고, 이제는 지문 중복이 단순 우연이라 보긴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이 문제의 '판박이 논란'은 해당 시험이 끝난 직후인 2022년 11월부터 제기됐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의 이의신청 게시판에 215건의 글이 실리는 등 많은 수험생들이 사설 문제집과의 중복을 지적했다.

당초 잔뼈가 굵은 업계 전문가들은 유착보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영어는 저작권 문제로 문제에 쓰기 좋은 지문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문항 풀(pool)이 제한돼서 우연히 겹쳤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지문은 베스트셀러 '넛지' 저자인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저서 '투 머치 인포메이션(Too Much Information)'에서 나왔다.

입시 전문가들의 입장이 바뀐 것은 'EBS 감수본' 때문이다. 문제의 지문(이하 TMI 지문)은 2023년 출간 예정이던 EBS 수능 연계 교재(감수본)에도 실려 있었는데, 이번 감사 결과 감수에 참여했던 대학교수 A씨가 수능 영어 23번 출제에 관여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감사원에 따르면 EBS 감수본에서 TMI 지문을 활용한 문제는 2022년 3월 고교 교사 B씨에 의해 출제됐다. A 교수는 같은 해 8월 감수를 마치고서 그 해 10월 수능 출제에 참여해 영어 23번을 제작했던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입시 전문가는 "100%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EBS 감수본에 실렸다는 것을 듣고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싶어 놀랐다"며 "일회성이라고 믿고 싶지만 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EBS 교재 감수엔 복수의 인사가 참여한다. EBS 측에 따르면 2025학년도 수능특강 영어 교재 3권 제작에 참여하는 인원은 집필진 31명, 검토진 70명에 달한다.

EBS가 보안서약을 받지만, 감수가 이뤄진 후엔 교재에 어떤 문제가 실릴 지 알음알음 알려질 수 밖에 없다. 잔뼈가 굵은 평가 전문가라면 그 지문이 사교육업체로 흘러 나갈 가능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서울=뉴시스] 지난해 7월2일 오후 서울시내 한 서점에 EBS 수능 수험서가 진열돼 있다. (사진=뉴시스DB). 2024.03.11. photo@newsis.com

그런데 감사 결과 EBS 교재 감수에 참여했던 A 교수는 EBS 보안서약을 어겨 가면서 자신이 감수한 TMI 지문을 수능에 출제할 때 활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이번 사건에서 가장 치명적인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수능 출제진과 사교육업체와의 직접적인 유착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경찰 수사가 더 필요해 보인다.

TMI 지문이 실린 '일타강사' E씨의 사설 모의고사 문제집은 지난해 9월 말 출간됐다. 이 문제를 제작한 인사는 EBS 교재 집필 경력이 있는 다른 고교 교사 C씨다.

감사원은 B씨와 C씨가 EBS 교재 집필을 하면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고 밝혔다. 다만 B씨가 자신의 TMI 지문을 C씨가 E씨에게 넘겨 줬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는지 여부에 대해선 감사원은 밝히지 않았다.

당시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 수능 출제본부 관계자들은 관리 부실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감사원은 이번 감사 결과, 평가원 출제본부 영어팀 관계자 4명이 문제가 됐던 영어 23번을 수능 이후 이의심사 준비 과정에서 수능 출제에 대한 공정성 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 해당 안건을 아예 이의심사위원회 심사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공모'했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외부 전문가 자문을 받으면서 내부 지침인 '기출문항 판정기준' 중 '같은 지문이라도 문제 유형이 다르면 기출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대목을 강조했다고 한다.

기출문항 판정기준을 평가원에 유리하게 해석하도 유도하고 E씨의 모의고사 문제집 미구매 사유도 거짓으로 설명함으로써, 수능 23번 문항과 모의고사 문항이 중복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받아 이를 이의심사실무위원회에 보고했다는 것이다.

평가원은 지금까지 매해 수능 출제 전 시중에 판매되는 문제집과 참고서를 수집한 뒤 출제본부가 가동돼 출제위원들이 합숙소에 입소할 당시에 배부해 왔다.

감사원은 평가원 측이 2020년과 2021년엔 문제의 일타강사 E씨의 문제집을 계속 수집했으나, 논란이 된 2022년에는 E씨의 문제집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구매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심지어 E씨의 문제집은 해당 업체의 홈페이지에서 구매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입시업계의 다른 전문가는 "출제당국의 관리 부실이 근본적으로 드러난 것"이라며 "평가원도 감사원 감사 정보 이상의 내용을 사전에 인지했다는 얘기인데 (관리를) 너무 불성실하게 한 게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서울=뉴시스] 김금보 기자 = 지난달 13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학원에 의대입시 홍보물이 붙어 있다. 2024.03.11. kgb@newsis.com

아울러 이번 감사에서는 교사들이 사교육 업체와 문항을 거래하고 그 문제를 다시 자신이 재직하는 학교의 내신 문제로 낸 심각한 도덕적 해이도 불거졌다.

수능 검토위원 경력이 있는 교사가 다른 검토위원 8명을 포섭해 소위 '문항공급조직'을 구성하고, 2019년부터 2023년 5월까지 2000여개 문항을 만들어 판 뒤 도합 6억6000만원을 수수한 사실도 감사로 밝혀졌다.

녹색정의당은 이날 논평을 내 "교원이 다른 교원을 포섭해 문항공급조직을 구성하는 등 적극 나섰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며 "직업윤리 위반, 도덕적 해이 그 이상이다. 교육자로서의 양심과 의무를 저버리고 부적절한 방법으로 사적인 이익을 챙겼다"고 했다.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 논란은 직전 2022학년도 수능 생명과학Ⅱ 출제오류 사태로 평가원이 이의심사 제도를 개편한 직후 발생했다. 평가원의 수능 출제 체계를 정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녹색정의당은 "수능 출제방식에서 기인한 것인지 수능 자체에서 기인한 것인지 원인 규명이 요구된다"며 "이의신청 제도를 개선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농락한 것이라면 백약이 무효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ddobagi@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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