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돌을 자찬하며 까칠하게 돌아봄
“80년대처럼 민주화운동 프리미엄을 업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스스로의 힘으로 시장을 개척하지 않으면 한겨레도 도태될 수밖에 없다. 신문만으로 승부를 볼 수 없다면 우선 신문 시장을 둘러싸고 있는 외곽부터 공략해 들어가자!”(한겨레신문 창간 10돌 기념 사사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
1992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민주화 프리미엄’은 시효가 다했다. 언론민주화운동에 투신하느라 세상을 몰랐던 ‘선비’들은 ‘시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시사주간지는 1988년 창간한 한겨레신문사가 처음부터 계획한 사업이었지만 이미 잡지 시장은 포화 상태였다. 그러나 신문만으로는 재정난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1993년 다시 추진안이 만들어졌다.
S#. 1990년대 초 창간 ‘전투’
1993년 6월 김중배 대표이사가 창간 결정을 내렸고 10월 준비팀이 만들어졌다. 불과 넉 달 만에 시사주간지를 창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세상을…>은 주간지 창간을 전쟁터로 묘사한다. 잡지 창간 결정을 “전투태세 명령”, 창간일을 “선전포고일”, 창간 작업을 “상륙작전”, 잡지 창간 노동자를 “병사들”, 인사발령을 “명령”으로 표현했다.
1994년 3월 김중배 대표는 창간사에서 “<한겨레신문>의 역량을 총동원해 시사정보지 시대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이겠다고 감히 약속한다”고 비장하게 밝혔다. 창간 멤버는 ‘정예’로 구성했다. 초대 편집장 고영재, 취재팀장 오귀환, 차장 곽병찬, 취재 김현대·여현호·이공순·이봉현·정재권·강석운·박태웅, 편집 김용기·윤승일·고경태…. 당시를 기억하는 기자들은 “천재는 아닐지라도 나름 괜찮은 기자들이었다” “에이스” “베스트 오브 베스트” 등으로 그들을 묘사했다. 하지만 여성 취재기자가 단 한 명도 없는 ‘남초’ 조직이었다. 이봉현 기자(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는 결혼을 앞두고 창간팀에 끌려 들어갔다. “3월16일 창간 직후인 4월10일 결혼했기 때문에 무척 바빴다. 선후배끼리 언성을 높이는 일이 일상이었고 멱살잡이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너무 많이 싸워서 창간호가 과연 나올 수 있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1990년대 초중반, 이념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대학 학생회실에서도 민중가요가 아닌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가 흘러나왔다. ‘신세대’ ‘엑스(X)세대’ ‘신인류’란 말이 등장했다. ‘민주화의 어른들’은 서울 대학로에서 연극 <노동의 새벽>을 보고 감격스러워했지만, 젊은 대중은 영화 <투캅스>를 보며 그 세련미에 감탄했다. 김종철 당시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은 이런 시대의 인지부조화에 현기증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지식인들과 대중이 진보적 세계관이나 철학을 갖지 못하고 찰나적 향락에 빠지거나 자기중심적 삶에 몰두하는 시대가 많이 있었는데 지금이 그렇지 않은가를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한겨레21> 창간호, 논단)
S#. 세기말, ‘21’이라는 희망
“1990년대 중반에 나온 <씨네21>과 <한겨레21>은 왜 ‘21’을 달았을까? 이 잡지들의 제목은 상징적이고도 시의적절한 것이다. (…) 잡지를 창간하는 일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퍼뜨리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잡지를 중심으로 앎과 삶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이 관여한다.”(<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천정환 지음, 마음산책 펴냄)
1994년 1월1일 새해 첫 신문 1면에 주간지 창간 알림이 나갔다. “21세기를 향한 뉴저널리즘 선언, 주간 고급정보지를 창간합니다.” “여러분이 편집자입니다. 이름부터 지어주십시오.” 1월5일부터 열흘 동안 2만5041명의 독자가 새 주간지의 제호 공모에 참가했다. ‘만파식적’ ‘민주21’ 등 여러 제호가 나왔지만 <한겨레21>이란 제호를 내민 이가 가장 많았다.
‘21’이란 숫자는 새천년을 시작하는 시대정신이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세기말, 천년이 바뀐다는 감각과 종말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새로운 시대를 낙관하고 기대하는 분위기도 공존했다. 당시엔 1980년대적인 것과 1990년대적인 것이 겹쳤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정동, 진보적 가치를 함께 담되 도발적이면서 발칙하고 논쟁적인 시대 분위기가 <한겨레21>에서도 느껴졌다”고 말했다.
창간호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특히 가판에서 압도적인 1위였다. “독자들이 오매불망 탄생을 기다리고, 열망하고, 사랑을 쏟아준 매체가 창간하는 역사의 한 장면에 일부로 참여했다는 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고경태 전 편집장(현 <한겨레> 사회부 이슈팀)은 말했다. 경력 기자로 들어온 그는 창간팀의 ‘막내’였다.
S#. 디자인 우위의 ‘껍데기’가 목표
새로운 주간지는 ‘꼴’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한겨레21>은 개인용 컴퓨터로 출판물을 제작하는 탁상출판시스템(DTP·Desktop Publishing)을 최초로 도입한 주간지였다. 전 공정 컴퓨터 제작 시스템을 만들고 실행에 옮긴 사람은 박태웅 기자(현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였다. 컴퓨터 조립 등 전자기기와 디지털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창간준비팀을 준비하는 “창간준비준비팀”에 차출됐다. 박 의장은 “기사 작성부터 인쇄까지 전 공정을 컴퓨터로 제작한 세계 최초의 주간지가 <한겨레21>”이라고 말했다.
“<타임>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다. 창간 다음 해, 매킨토시를 수입하는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일보 출판국에서 ‘컴퓨터 제작 시스템을 도입하고 싶은데 <한겨레21> 시스템을 3세트씩 맞춰달라’고 주문해왔다는 것이다. ‘매킨토시·스캐너·출력기 등의 구성으로 판매하려는데, 이 시스템을 처음 만든 곳이 <한겨레>니까 허락해준다면 똑같이 판매하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기뻤다.”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편집기자, 디자이너, 취재기자, 데스크의 컴퓨터를 모두 하나의 케이블로 연결해서 파일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았다. ‘전 공정의 전자출판화’는 디자인 혁명과 함께했다. <시사저널> <주간조선>보다 큰 5×7배판의 판형을 내놓았다. 아트디렉터 이재용을 위시한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합류해 새로운 레이아웃을 만들었다. 기사 아이템이 발제되면 편집, 취재, 사진, 디자이너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우리가 마음먹으면 얼마나 세련되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자고 의기투합했다. 창간 전 2~3주 분위기가 살벌했지만 그다음엔 쭉 좋았다. 정말 세련되고 아주 잘 팔렸으니까. 축구팀이 계속 이기면 팀 분위기는 좋아진다.”(박태웅)
한글 가로쓰기를 처음 시작한 <한겨레신문>은 혁신적이지만 촌스럽다는 지적이 있었다. <한겨레21>은 감각적이었다. 특히 표지는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중모드적 의미구축에 관한 연구’(송일준,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2016)를 보면, <한겨레21> 표지는 이미지를 언어보다 화면 위쪽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되, 표지 문구로 시각적 의미를 보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는 뜻이다. 이런 식의 표지는 창간준비팀에서부터 기획됐는데, 텍스트와 이미지 비율을 적어도 5:5로 하자는 원칙 등 디자인 우위의 ‘껍데기’가 목표였다. 감각적 표지, 발랄한 제목, 경성과 연성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기사는 폭발적 호응으로 이어졌다.
창간호를 받아본 독자들은 “여성지를 보는 느낌”이라며 신선함에 점수를 줬으나 “일러스트가 생동감 없다” “오탈자가 많다” 등 비판도 함께 쏟아냈다. 자신을 출판업에 종사한다고 밝힌 서울 도봉구의 한 독자는 “다섯 시간을 읽고 30분간 정리한 글”이라며 조목조목 ‘칼질’해서 독자엽서를 보냈다. “그래도 나는 정기구독을 신청하겠다”고 그는 밝혔다.
2002년부터 <한겨레21> 디자인 총괄을 해온 장광석 디자인주 실장은 지금도 표지 제작을 맡고 있다. 작업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심플할 것, 이미지가 쉽게 읽힐 것, 유니크할 것, 완성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땐 마감하고 쉬는 상황에서 다시 출근해 ‘표지갈이’를 했다. 이슈 자체도 충격이었고 제작하면서도 힘겨웠다. 기억에 남는다.”
S#. 시장, 상품, 정치성
“저는 <한겨레21>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파적인 언론매체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 약자들의 편에 서겠습니다. 진보언론이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습니다.”(<인물과 사상> 2005년 7월호 인터뷰)
고경태 기자는 30대 때 <한겨레21> 최연소 편집장이 됐다. 여러 ‘히트 상품’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김어준, 김규항, 최보은이 인터뷰어로 나서서 인터뷰이를 도발하는 ‘쾌도난담’이었다. 2000년 9월에는 <시사저널> 편집인 겸 편집국장 김훈(소설가)이 초대됐다. 김훈은 선을 넘었다. 페미니즘을 “못된 사조”라고 깎아내리고 “여성들한테는 가부장적인 것이 가장 편안한 거” “인종 사이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했다.(제327호 ‘쾌도난담: 위악인가 진심인가’) 보도 이후 논란이 일자 김훈은 회사를 관뒀고, <한겨레21>은 본의 아니게 경쟁지 편집장을 날린 셈이 됐다.
논쟁적 기사의 가치를 높이 샀던 고 전 편집장은 <한겨레21>에서 코디네이터 구실을 맡았고 그 자신이 ‘스타 기자’로 발돋움했다. <인물과 사상> 인터뷰에서 그는 “<한겨레21>은 상품이다”라고 선언했다. “기자들을 상품화” “스타군단화”하고 “명품 잡지” “재미있는 고급잡지”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인터뷰어 지승호씨는 “<한겨레21>의 정치적인 포지션”이 궁금하다고 끈질기게 따졌다. ‘진보언론’에 붙박이지 않고 독창적인 기획과 재미난 글로 승부하겠다는 생산자와 그 매체의 정치적 입장을 추궁하는 시민 독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한겨레신문사 경영진 사이에서도 “재미도 좋지만 심층기사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임팩트 없는 기사보다 차라리 선정주의를 찬양하겠다는 게 고 전 편집장의 ‘주의’였다. ‘읽는 재미’로 ‘상품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창간 초기부터 좌충우돌 이어졌다. 오귀환·곽병찬 편집장은 “뭐 좀 재미있는 거 없어?”라고 기자들을 닦달했다. 패션의 ㅍ도, 뷰티의 ㅂ도 모르는 남성 ‘마초’ 기자들이 머리를 식탁에 처박아 술잔을 떨어뜨리는 ‘마빡주’를 마시면서 ‘올해의 유행 립스틱’ 같은 기사를 발제하고 썼다. 도전적인 발제가 늘 성공적인 건 아니었다.
은폐된 진실을 파헤치고 약자를 대변하려는 태도는 중심에 뒀다. <한겨레21>은 창간 당시부터 외국인노동자 인권, 1999년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보도, 2001년 양심적 병역거부, 2009년 장기 참여관찰형 탐사보도의 장을 연 ‘노동OTL’ 시리즈, 2014년 세월호 참사 보도, 2018년 연중기획 ‘난민과 함께’, 2021년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2023년 자살사별자 이야기 등의 기사로 한국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정치적 포지션’은 환영받지 못했다. 거대 양당 구도에서 ‘전통적 야당’인 민주당을 지지하는 세력과도, <한겨레>를 만든 창간주주나 독자 다수와도 꽤 다른 정치적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정영무 편집장은 “역사적·사회적 의미의 21세기는 올해가 첫해 (…) 해방 이후 처음으로 주류가 바뀌었다”(‘만리재에서’)고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보수 진영에서 쏟아낸 ‘경제색깔론’의 빌미는 참여정부가 자초했다거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별안간 제의했다며 노 대통령의 예측불허 행보를 비판하기도 했다. <한겨레21>은 신문사 내부에서 ‘본지’라고 일컫는 <한겨레>보다 더 민주적이고 더 진보적이며 더 까칠하고 더 젊은 매체로서 도전을 거듭했지만, 정치적 급변기마다 빗발치는 항의와 저항을 맞닥뜨려야 했다.
S#. 어느 길로 갈까
성역은 없었지만 성역할은 공고했다. 성매매, 부부강간, 아내의 외도, 장애인의 성 같은 낯 뜨겁고 낯 붉힐 만한 이야기도 종종 썼다. 그렇다고 편집부가 성인지적 감수성을 충분히 갖췄다고 볼 수는 없었다. 여성 편집장이 탄생한 것은 사반세기가 지난 창간 26년 만이었다. 그 뒤 세 명의 여성 편집장이 연달아 나왔다.
<한겨레21> 첫 여성 편집장이 된 정은주 기자는 대학 시절부터 <한겨레21>을 챙겨 볼 정도로 열성적인 구독자였다. “첫 여성 편집장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며 일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주요 콘텐츠 제작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정 편집장 체제는 ‘프로젝트 너머n’ ‘북한이탈여성 #미투’ ‘엔(n)번방 이전의 n번방’ ‘#미투 극장전’ ‘내 말은 총알이 된다’ ‘차별금지’ ‘국가의 허용은 필요 없다’ ‘#2030 여성 우울증’ ‘새로 쓰는 할머니 이야기’ ‘미투 3년’ 등 젠더 관련 아이템을 다수 보도했다.
뒤를 이은 황예랑 편집장(현 <한겨레> 미디어전략실 실장)은 ‘페미사이드’(여성을 일컫는 라틴어 ‘femina’와 살인을 뜻하는 영어 ‘homicide’의 합성어) 심층기획을 지휘했다. 제대로 된 통계나 연구조차 없는 이슈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9명의 이름과 삶을 기록하기 시작한 ‘미안해, 기억할게’ 시리즈도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희생자 수십 명의 사진을 한꺼번에 모아 보도한 것은 <한겨레21>이 처음이었다. 유가족들이 혐오 댓글 등에 더 상처받지 않을까 뉴스룸 안에서 정말 치열하게 토론하고 표지 디자인을 수정했다.”
<한겨레21>에서만 15년 넘게 일해온 ‘21의 증인’ 구둘래 전 편집장은 “젠더 이슈 격변기에 여성 편집장이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필자 중 여성 비율을 적어도 절반을 가져간다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지면 벡델테스트(영화 속 성평등 측정 시험)’가 있다면 통과할 게다.” 진보언론의 진지함과 엄숙주의를 깨려고 한 발랄한 도전의 흔적은 꽤 희미해졌지만 <한겨레21>은 젠더, 인종, 계급 등 억압의 서로 다른 교차성과 위치성을 고민하는 또 다른 프리즘을 장착하게 됐다.
30년 만에 세상은 급변했다. 첨단 전자시스템으로 제작하던 종이잡지는 디지털 매체 시장을 겨냥한 유튜브 콘텐츠를 시작했다. 끝없이 ‘정치적 포지션’을 질문받아온바, <한겨레21>의 정세 판단도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천정환 교수는 “지금은 ‘검찰 독재’라는 말로 상징되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와 여성·소수자·이주민의 인권을 증진하려는 전선이 늘 얽혀 있다. 그 문제는 복잡하고 대의하기도 힘들다. 두 가지 모두를 재현하는 대의정치는 현재 탄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30년은 기록 투쟁이었다. 1504권의 종이잡지와 ‘데이터’는 한국 사회의 공적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그 유명한 <선데이서울>보다 <한겨레21>이 더 오래 살아남았다. 이 문장을 30년 만에 쓴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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