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영어 23번 의혹 사실이었다…교사·학원 강사 조직적 문항 거래
“문항 거래로 돈 받은 다수 교원에게 엄중히 책임 물을 것”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영어영역 23번 문항 지문이 대형 입시업체 소속 일타강사가 제공한 사설 모의고사 문제와 비슷해 ‘문항 거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감사원 감사 결과 사실로 확인됐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당시 ‘지문 판박이’ 의혹에 우연의 일치라고 해명했었지만, ‘사교육 카르텔’이 실제로 확인됐다.
수능 출제에 참여한 교사나 EBS 수능 연계교재 집필에 참여한 교사들이 사교육 업체와 문제를 거래한 것도 이번 감사에서 드러났다. 문항 거래는 피라미드식 조직을 갖추고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감사원 감사 결과 “’사교육 카르텔’은 사실”
감사원은 현직 교사와 사교육 업체 간 문항 거래 등 유착 우려가 제기되자 지난해 9~12월 ‘교원 등의 사교육시장 참여 관련 복무실태 점검’ 감사를 실시해 11일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원은 이번 감사에서 수능 경향에 맞춘 우수한 문항을 공급받으려는 사교육업체와 금전적 이익을 원하는 일부 교사 간에 금품을 주고받으며 문항을 거래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 같은 문항 거래는 ‘국가공무원법’(사립학교 교사는 ‘사립학교법’)을 위반한 것이다. 감사원은 2023학년도 수능 영어 영역 23번 관계자를 포함해 신속한 수사가 필요한 교사와 입시 업체 관계자 등 56명을 청탁금지법 위반, 업무방해, 배임 수·증재 등 혐의로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앞서 교육부는 지난해 9월 현직 교사로부터 자진 신고를 받아 수능·모의평가 출제에 참여한 후 사교육 업체에 문제를 판매한 22명(2명 중복)은 청탁금지법, 정부출연연법상 ‘비밀유지의무 위반’ 혐의로 수사 의뢰했다. 감사원 감사 결과 수사 의뢰 대상이 교육부 발표보다 30명 이상 늘었다.
‘사교육 카르텔’ 규모는 수사 과정에서 더 커질 수 있다. 감사원은 “그 외 문항을 거래하고 금품을 수수한 것으로 확인되는 다수 교원에 대해서도 감사위원회 의결을 거쳐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학원 강사가 출제 교사와 친분 있는 다른 교사에게 문항 입수
논란이 된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 지문은 ‘넛지’의 저자인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출간한 ‘투 머치 인포메이션(Too Much Information, TMI)’에서 발췌됐다. 이 지문은 비슷한 시기 제작된 EBS 수능 교재 감수본에 실렸다가 최종본에서 제외됐다.
감사원에 따르면 고교 교사 A씨는 2022년 3월 TMI 지문을 이용해 영어 문제를 출제했다. TMI 지문은 이듬해 1월 출간 예정이던 EBS 수능 연계 교재에 포함됐다. 대학 교수 B씨는 2022년 8월 EBS 교재 감수에 참여하며 이 지문을 알게 됐다. B씨는 그해 10월 2023학년도 수능 영어 출제위원으로 위촉됐고, EBS 교재에 실린 TMI 지문을 무단으로 수능 영어 23번 문제로 출제했다. A씨는 EBS 허락 없이 교재 집필 중 알게 된 사실을 유출하지 않는다는 보안 서약서를 썼지만 지키지 않았다.
유명 강사 C씨는 평소 교사에게 문제를 구입해 사설 모의고사를 만들고 있었다. C씨는 TMI 지문의 원래 출제자와 친분이 있는 다른 교사 D씨를 통해 TMI 지문으로 만든 문항을 받아 9월 말 모의고사에 출제했다. 감사원은 “C씨는 평소 EBS 교재 파일을 출간 전에 입수하고 수능 출제 의도를 파악하는 등 평가원 동향을 확인하고자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TMI 지문이 사설 모의고사에서 활용됐지만 수능에 출제될 수 있었던 데에는 평가원이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도 있다. 평가원 영어팀은 사설 모의고사 문항과 수능 문항이 겹치는 게 없는지 확인하려 C씨의 모의고사를 2020학년도, 2021학년도 수능을 앞두고는 구매했다. 그런데 2022학년도에만 합리적 이유 없이 구매하지 않아 검증 대상에서 빠졌다.
수능이 끝나자 마자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C씨의 모의고사를 미리 풀고 해설 강의를 들은 학생에게 유리한 문항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수험생들은 이 문항과 관련해 평가원에 이의 신청을 215건이나 했지만, 평가원은 문제·정답 오류에 대한 이의 신청이 아니기 때문에 심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심사조차 하지 않았다.
감사원에 따르면 평가원 담당자들은 수능 출제에 대한 공정성 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영어 23번을 이의심사위원회 심사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기로 공모했다. 담당자들은 외부 전문가 자문을 실시해 ‘기출문항 판정 기준’으로 평가원에 유리하게 해석하도록 유도했다. C씨의 사설 모의고사를 구매하지 않은 이유도 “개인 수강생만 접근할 수 있어서 인지하지 못했다”고 거짓으로 설명했다. 이 모의고사는 학원 홈페이지에서 살 수 있었다.
◇현직 교사가 동료 교사와 ‘피라미드형 조직’ 만들어 문제 거래 주도하고 수수료 챙겨
사교육 업체와 현직 교사들의 문제 거래는 피라미드 조직 형태로 이뤄졌다. 감사원에 따르면 고교 교사 E씨는 수능과 모의평가 검토위원으로 여러 차례 참여하며 알게 된 교사 8명을 포함해 문제 공급 조직을 만들었다.
E씨는 교사들과 2019년부터 작년 5월까지 수능 경향을 반영한 모의고사 문제 2000여개를 만들어 학원 강사 등에게 건네고 6억6000만원을 받았다. E씨는 이 중 3억9000만원을 교사들에게 지급하고 나머지 2억7000만원은 자신이 문항 제작비와 알선비 명목으로 챙겼다. 이 과정에서 세금을 내지 않으려 배우자 등 타인 명의 계좌로 2억1000만원을 받기도 했다.
E씨가 만든 조직에 속해 사교육 업체에 문항을 공급하던 교사 F씨는 이 사실을 숨기고 평가원에서 일했다. F씨는 2022년 1월 평가원으로부터 파견 근무를 요청받으면서 ‘최근 3년간 상업용 수험서 집필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없다”고 답했다. F씨는 평가원에서 근무하던 중에도 E씨와 함께 문항 거래를 계속해 2020년부터 2023년 4월까지 5100만원을 받았다.
고교 교사 G씨는 배우자가 설립한 출판 업체를 공동 경영했다. G씨는 교재를 집필하며 알게 된 교사와 자신이 속한 학교 교사 등 35명을 섭외해 문항 제작팀을 만들었고, 사교육 업체 등에 문제를 넘겨 수억원을 챙겼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문항 판매 대가로 18억9000만원을 받았고, 다른 교사들에게 지급한 대가 등을 제외한 영업이익은 1억1000만원이었다. G씨는 감사원에 허위 자료를 제출하며 감사를 방해하기도 했다.
이밖에 교사가 EBS 교재 파일을 출간 전 빼돌려 비슷한 문제를 만들어 팔고, 사교육 업체에 공급한 문제를 학교 중간·기말고사에 출제한 사례도 있었다.
감사원은 “수능 경향에 맞춘 문항을 공급받으려는 사교육 업체와 금전적 이익을 원하는 일부 교원 간에 금품 제공을 매개로 뿌리 깊게 문항 거래가 자리 잡은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현직 입학사정관이 입시업체 취업해 자기소개서 작성 강의하고 돈 받아
사교육 업체에 취업해 자기소개서 작성을 강의하고 부당하게 금품을 받은 현직 입학사정관도 적발됐다. 고등교육법상 입학사정관은 퇴직 후에도 3년간 학원이나 입시 상담 업체 설립과 취업이 금지된다. 다만 법을 위반하더라도 제재할 규정은 없다.
한 대학의 입학사정관 H씨는 2020년 7월 공정한 업무 수행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경제적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고도, 다음 달 입시 컨설팅 업체에 취업했다. H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부 정보를 이용해 학생들의 자기소개서 작성을 지도하며 그해 8~11월 300만원의 금품을 대가로 받았다.
감사원은 “입학사정관 퇴직 후 3년간 학원 등 취업제한 위반사례를 점검한 결과 다수의 위반 사례가 확인됐다”며 “교육부에 제도 개선 등을 조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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