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과 전생, 한국인만 아는 사랑의 형태…놀란 감독도 놀란 '패스트 라이브즈'

안시욱 2024. 3. 1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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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셀린 송 감독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
'인연' '전생' 등 한국식 정서 녹여내고
클리셰 벗어난 캐릭터, 연극적 무대 구성 돋보여
크리스토퍼 놀란 "섬세하게 아름다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야심한 새벽, 미국 뉴욕의 술집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 동양인 남녀 '나영'과 '해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열띤 대화 중이다. 그 옆에서 미국 남성 '아서'가 말없이 핸드폰을 스크롤 한다. 이들의 대화는 관객한텐 들리지 않는다. 동양인 부부와 백인 가이드일까, 직장 동료일까, 또는 치정의 현장일까. 관계에 대한 궁금증만을 남긴 채 이야기는 시작한다.

6일 개봉하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다. 나영과 해성은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둘의 관계는 나영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 가며 갈라진다. 12년 뒤 우연히 SNS를 통해 재회하지만, 각자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멀어진다. 그로부터 다시 12년이 흐른 현재 해성은 나영을 만나러 뉴욕을 찾는다. 나영의 곁은 남편 아서가 지키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이 자신의 실제 경험을 풀어낸 장편 데뷔작이다. 이민자 출신 감독이, 그것도 데뷔작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유태오, 그레타 리 등 한국계 배우들이 이끌어가는 이번 로맨스는 전 세계 영화상 75관왕을 석권했다. 오는 10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펜하이머' '바비' 등 대작들과 나란히 작품상 후보에 오른다.

구태의연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인연'과 '전생' 등 영화의 철학적 배경은 가볍지 않고, 카메라 구도와 소품 등 연극적 장치들은 정교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사랑을 다룬 '이터널 선샤인'(2005) 등을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또 한 번 '운명의 영화'로 꼽을 만한 수작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뻔한 서사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 '인연'이다. 나영은 아서한테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어엔 '인연'이란 말이 있어. 섭리나 운명을 뜻하는 건데, 전혀 모르는 사람 둘이 길을 걷다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해." 인연 개념에 익숙한 한국 관객한텐 다소 유치할 수 있지만, 해외 관객이라면 신선하게 느낄 만한 대목이다.

언어는 달라도, 모든 사람은 잊지 못할 인연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 터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보편적인 지점을 아름답게 다듬었다. 미국 관객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지난해 6월 미국에서 소규모로 개봉한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북미 전역에 확대 개봉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을 비롯한 영화계 거장들도 "섬세하게 아름다운 영화" 등 극찬을 보냈다.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영화 마무리 부분 나영과 해성이 헤어지는 장면의 연출이 압권이다. 둘은 아무 대사 없이 1분가량 서로를 마주 본다. 이별의 슬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분노 등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을 극도로 절제된 연기로 풀어냈다. 감정이 무딘 관객이라도 눈시울을 붉힐 만한 장면이다.

클리셰를 깨부수는 캐릭터들도 매력적이다. 나영의 현재 남편인 미국인 아서 얘기다. 일반적인 멜로극과 달리, 아서는 운명적인 첫사랑을 방해하는 악당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지독하게 엇갈린 해성과는 반대로 나영이 의지할 수 있는 현재이자 미래다.

영화를 분류하자면 미국의 아시아계 이민자를 그린 디아스포라 갈래지만, 해성과 나영의 관계 속에서만큼은 아서가 외부인이다. 극 중 아서가 한국어로 잠꼬대하는 나영한테 건네는 대사는 곱씹을 만하다.

"가끔은 그게 겁나. 당신이 내가 이해 못 하는 말로 꿈꾸는 것. 당신 마음속에 내가 가지 못하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잘 짜인 연극을 연상케 하는 치밀한 구성도 돋보인다. 15년간 극작가로 활동해온 감독의 경력이 빛을 발한 결과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초반 술집 장면부터 연극 무대처럼 연출했다. 서서히 나영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데, 곧이어 나영이 스크린 밖 관객을 응시한다. 영화 내외부를 가로막는 '제4의 벽'을 가뿐히 허물며 관객을 작품 속 세계로 초대한다.

작품 내내 등장하는 이분법적 화면 구성은 나영과 해성의 운명을 암시한다. 추억에 머무는 해성은 왼쪽에, 미래의 인연을 찾는 나영은 오른쪽에 배치된다. 어린 시절 둘의 첫 데이트 장소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석조조각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응시'(1994)부터 가로수에 의해 둘로 갈라진 모양새다. 뉴욕에서의 짧은 만남 이후 헤어지는 장면에서도 해성은 왼쪽으로, 나영은 반대편으로 나아간다.

해피엔드를 기대하고 봤다간 먹먹한 감정만 가득 안고 돌아올 수 있겠다. 둘의 인연은 다음 생에서라도 닿을 수 있을까. 작품은 나영과 헤어진 해성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늘 화면 왼쪽에 머물렀던 해성은 작중 처음으로 미래를 상징하는 오른쪽으로 달린다. 후련한 듯한 그의 표정이 한편으로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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