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수능·일타강사 ‘판박이 지문’... 감사원, 유출 의심해 수사 요청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영어 23번 문항 지문이 ‘일타 강사’의 문제집에 포함된 것과 관련해 감사원이 ‘지문 유출’ 정황을 발견하고 11일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교원 등의 사교육시장 참여 관련 복무 실태 점검’ 감사를 진행하고 있는 감사원은 이날 중간 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23번 문항 지문 유출 논란과 관련된 교사 및 당시 수능 출제위원이었던 대학교수, 유명 입시 학원 강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 등에 대한 수사를 경찰청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2022년 11월 치러진 2023학년도 수능의 영어 23번 지문은 캐스 선스타인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책 ‘투 머치 인포메이션(Too Much Information·TMI)’의 79쪽에서 발췌됐다. 그는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오른 저서 ‘넛지’의 저자다. 당시 ‘TMI’는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TMI의 같은 부분을 발췌한 지문이 입시 업체 메가스터디의 일타 강사 조모씨가 2022년 9월 출간한 영어 모의고사 문제집에도 포함돼 있었다. 다른 과목의 경우 지문이 겹친 것만으로는 ‘문항 중복’으로 간주하지 않지만, 영어는 지문이 일치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문을 먼저 접한 수험생들이 유리하다. 지문을 처음 접하고 해석하는 데 들이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능 직후 평가원에는 영어 23번에 대한 이의 신청이 215건 접수됐다. 전체 이의 신청 349건의 61.6%였다. 그러나 평가원은 이 이의 신청을 이의심사위원회에 올리지도 않고 ‘종결’ 처리해버렸다. 평가원은 지문이 겹친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감사원이 조사해 보니, 수능 출제위원과 사교육 업체 간 유착을 통해 지문이 유출됐을 가능성을 의심할 만한 여러 정황이 드러났다. 대학교수 김모씨는 앞서 2022년 8월 EBS의 수능 연계 영어 교재를 감수했는데, 여기에는 고등학교 교사 A씨가 TMI의 79쪽을 내용을 발췌해 지문으로 출제한 문항이 들어 있었다. 김 교수는 2022년 10월 수능 출제위원으로 위촉돼 활동하면서 A씨의 TMI 지문을 무단으로 가져다가 출제에 사용했다. 질문은 달랐지만, 지문은 같았다. A씨의 TMI 지문이 들어 있는 EBS 교재는 2023년 1월 출간 예정이어서 당시에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메가스터디 강사 조씨가 다른 고교 교사 B씨로부터 TMI 79쪽을 지문으로 사용한 문항을 공급받은 것도 2022년 8월인 것으로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B씨와 A씨는 EBS 교재 집필진으로 서로 친분이 있는 관계였다. 또 조씨가 다른 고교 교사 C씨를 통해 그전부터 EBS 영어 교재를 출간 전에 미리 입수해온 사실도 확인됐다.
조씨는 TMI 79쪽 지문이 들어간 문항을 2022년 9월 사설 모의고사에 냈다. 그런데 평가원은 수능 문항 지문이 사설 모의고사 문항 지문들과 겹치지 않는지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유독 조씨의 2022년 9월 모의고사 문항과의 비교를 빠뜨렸다. 그래서 김 교수의 TMI 79쪽 지문을 이용한 문항이 수능에 그대로 출제됐다.
감사원은 A씨와 B씨 사이에 지문 유출이 있었는지, 조씨가 TMI 79쪽 지문이 들어간 EBS 교재도 C씨를 통해 미리 입수했는지 등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감사원은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없는 부분,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강제 수사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보고 조씨와 A·B·C씨 등에 대한 수사를 경찰에 요청했다.
평가원 직원들이 수능 영어 23번 문항을 두고 쏟아진 이의 제기가 부당하게 각하되도록 한 사실도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감사원에 따르면, 평가원 담당자 4명은 수능 영어 23번에 대한 이의 제기가 잇따르자, ‘수능 출제에 대한 공정성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며 관련 이의 제기 건들이 아예 이의심사위원회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기로 공모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다른 과목에 적용되는 중복 문항 판정 기준을 외부 전문가들에게 제시해, 지문이 겹친 것만으로는 중복 문항으로 판정되지 않는다고 답변하도록 유도했다. 또 조씨의 모의고사 문항을 미리 확보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개인 수강생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어서 미리 알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는 2020년과 2021년에는 조씨의 9월 모의고사를 정상적으로 구매해 문항 중복 여부 점검에 활용했고, 2022년에만 빠뜨린 것이었다.
이런 외부 전문가 의견을 받은 이의심사실무위원회는 관련 이의 제기 안건을 모두 ‘제외 사안’으로 판단했고, 그대로 ‘종결’ 처리됐다. 감사원은 평가원 담당자들이 “이의심사실무위원회 위원들을 기망했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평가원 직원들에 대해서도 부정 가능성을 의심해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지소연, 국내 리그에 쓴소리 “천막 탈의 외국이면 난리 나”
- 의사들 골프 접대 위해 ‘상품권깡’한 제일약품, 과징금 3억원
- [르포]수송함 갑판을 활주로 삼아…고정익 무인기가 날아올랐다
- 野 의원 41명 ‘尹 탄핵 연대’ 발족… “200명 모을 것”
- 연말정산 때 얼마나 돌려받을까…15일부터 ‘연말정산 미리보기’ 가능
- [속보] 고려아연, 2.5조원 규모 유상증자 계획 2주 만에 철회
- ‘포르쉐 159㎞ 질주 사망 사고’ 운전자 1심서 징역 6년
- 중국 BYD, 내년 초 국내 출시... 중형 ‘씰’ 유력...국내 업계에 위협 관측
- 부산 의원 수능 응원 현수막에 웃음 ‘빵’...조회수도 터졌다
- [단독] 울산시 ‘위장 재활용’ 첫 제동…환경부에 대책 마련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