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농담 “바른 말하는 참모 많아 힘들어”

한겨레 2024. 3. 11. 14: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57화 위징이 너무 많아!
국사는 물론 세계사 관심 많고 해박해
참모와 식사·차담서 수시로 역사 질문
하루 놀아도 조바심 났던 노 전 대통령
“나는 일벌레라, 참모들이 불운해”
2003년 11월24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이정우 정책실장의 보고내용을 경청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그 왼쪽으로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 유인태 정무수석, 문재인 민정수석이 보인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3년 5월29일(목) 오후 4시 청와대 연무관에서 경호실의 무도 시범 및 다과회가 열렸다. 암살 시도에 대한 방어를 주제로 한 시범인데 칼과 몽둥이가 난무해 박진감이 넘쳤다. 행사 뒤 다과회에서 자연스레 암살이 화제에 올라 내가 노 대통령 내외에게 진시황과 자객 형가 이야기를 해드렸다. 몇 달 뒤 노 대통령이 나에게 자객 형가 이야기의 어떤 대목을 다시 묻기에 설명했다. 해가 바뀌어 2004년 1월1일(목) 관저 만찬에서 자객 형가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기에 내가 좍 설명하니 유인태 정무수석이 “이 위원장은 경복고도 안 나왔는데 역사에 강하네” 하기에 “경복고만 역사에 강한 게 아니고, 경북고도 강하다”고 답했다. 노 대통령이 농담을 했다. “권오규 수석은 돈 되는 것 잘 알고, 이 위원장은 돈 안 되는 것 잘 안다.” 노 대통령은 역사에 관심이 많고 아는 것도 많았다. 청와대에서 차 마시거나 식사중에 자주 역사 이야기를 꺼내거나 질문을 했다. 주제는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미국사, 남미사 등 종횡무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 대통령이었다.

2003년 8월12일(화) 12시 노 대통령, 고건 총리와 3실장이 꼬리곰탕 점심을 먹었다(백악실). 나종일 안보실장이 “100년전 자본주의 대안을 제시한 두 사람이 레닌과 간디”라고 하기에 내가 반론을 제기했다. “간디는 역사 후퇴이니 대안이 못된다. 힌두와 이슬람 화해를 주장하면서도 자기 아들이 이슬람 여자와 결혼하려는 걸 반대했고, 천민을 무시했고, 반노조, 반여성 등 별로 존경할만한 인물이 못된다.”(나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간디를 존경한다는 보도를 읽었다). 화제가 바뀌어 나종일 실장이 “한국은 대외 배타적인데 일본은 더 배타적”이라고 주장하니 문희상 실장이 반대라고 주장했다. 나는 문실장 편을 들었다. “한국이 일본보다 더 배타적이다.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 차별철폐운동을 열심히 한 강재언 교수가 한국에서 중국 화교에 대한 차별을 보고 나서는 부끄러워 더 이상 운동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이 고건 총리에게 “교수 출신들의 현란한 지식은 감탄스럽지요?”라고 하기에 내가 “아닙니다” 하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나오면서 문희상 비서실장이 말했다. “대통령 앞에서 이야기 많이 하면 숙제가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는다. 군대에서도 그렇잖아요. 차트 잘 그리는 사람은 노상 차트 그리고.” 하하, 문 실장은 ‘외모는 장비, 머리는 조조’라더니 맞는 말이다.

2005년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2주년을 맞아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하여 국정연설을 통해 집권 2년간의 국정운영 경과를 보고하고 향후 국정과제와 국정운영의 기조를 밝혔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11월24일(월) 9시 수석회의에서 부안 핵폐기장 사태 추이를 보고받던 노 대통령이 화가 나 단호한 어조로 민주주의 문제를 거론했다. “영국의 대처 총리가 비록 신자유주의라고 비판받지만 그 대신 리더십은 인정할 만하지 않으냐. 천안문 사태 때 등소평이 진압하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중국이 있겠느냐? 어떻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회의가 끝날 무렵 조윤제 경제보좌관이 걱정되는지, “아까 대처, 천안문 발언은 언론에 안 나가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노 대통령이 동의하며 다시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관계를 이야기하기에 내가 한 마디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사이의 관계는 최근 연구 결과 별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니 성장을 위해 구태여 민주주의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 천안문 사태와 경제 실적은 별로 관계가 없다. 지나친 개혁, 성장으로 인한 경제과열로 인해 1989~1992년 조정기를 거쳤고, 1992년 등소평이 남순강화를 통해 다시 경제성장에 불을 붙였다. 천안문 사태를 대화로 해결하려던 온건파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이 실각했지만 먼 훗날 재평가될 거다.” 노 대통령이 문희상 비서실장을 돌아보며, “이거 본전도 못 찾았네요”라며 웃었다. 나종일 안보실장이 대처리즘을 비판하자 박주현 수석이 거들었다. 회의 뒤 김희상 국방보좌관이 다른 일로 나와 통화하던 중 천안문 관련 내 견해를 ‘탁견’이라고 칭찬해주었다.

한 달 뒤 12월23일(화) 12시 백악실에서 대통령, 총리, 청와대 3실장의 정례 오찬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나의 천안문 견해를 반대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정책실장은 사태를 낭만적으로 본다. 당시 잠시라도 끈을 놓으면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등소평이 옳지 않았겠나”라고 노 대통령이 말했다. 견해 차이다.

이날은 며칠 전 KBS TV에서 특집 방영한 이라크의 후세인이 화제에 올랐다. 후세인은 지독한 스탈린 숭배자로서 스탈린에 관한 책을 몽땅 읽고 모방했다고 한다. 당 대의원 회의에서 180명 대의원 앞에서 후세인이 연설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 호명하는 사람은 밖으로 나가라.” 60명을 호명해 바로 총살했다. 나종일 안보실장이 스탈린이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등 혁명 동지들을 숙청한 이야기를 하기에 내가 보충 설명을 했다. “정치국 회의에서 미망인이 낭독한 유서에서 레닌은 혁명동지들을 한 명씩 평가했는데, 스탈린에 대해서는 음흉하고 믿을 수 없는 인물로 지칭하며 절대로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언명했다. 스탈린은 뒤로 물러나 기회를 노리며 좌파, 우파를 왕복하며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 결국 권력을 장악했다.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동지들을 숙청하고 독재로 갔다.” 나종일 실장이 말했다. “숙청된 동지 중 부하린은 애석하다. 당내 최고 이론가였고, 인품도 훌륭했는데 사형당했다. 감옥에서 스탈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소용없었고 스탈린은 가끔 그 편지를 꺼내 읽는 걸 즐겼다.” 내가 덧붙였다. “부하린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억울하게 죽었다. 뒤에 후르시초프가 부하린을 복권 시키려고 정치국 회의 안건으로 올렸는데, 마침 그때 소련 방문중이던 루마니아 대통령이 참석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동유럽은 모두 스탈린 숭배자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1988년 고르바초프 때 부하린이 사후 반세기만에 복권됐다. 그때까지 부하린의 부인이 살아 있어 남편의 명예회복을 보고 죽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2월25일 오전 국회에서 취임2주년 국회연설을 마친 뒤 의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05년 2월25일(금) 12시 인왕실에서 대통령 내외와 실장, 수석들이 참석해 참여정부 2주년 기념 오찬이 있었다. 건배사 부탁을 미리 받고 생각을 해봤다. 청와대 떠날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하고 이런 건배사를 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당 태종 밑에 바른말 하는 위징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위징이 자주 바른말을 하니 당 태종이 참고 또 참다가 어느 날 드디어 분노가 폭발했다. ‘저놈의 영감탱이를 오늘은 죽이고야 말겠다’고 안방에 들어와 칼을 찾았다. 현모양처의 표본인 장손황후가 사라지더니 잠시 뒤 황후의 정식 예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태종에게 큰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자고로 명군 밑에는 바른말 하는 신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른말 하는 위징이 있음은 곧 폐하가 명군이라는 뜻이니 감축드립니다.” 기분이 좋아진 태종이 말했다. “아까 일은 없던 일로 하지요.” 내 건배사가 끝나자 노 대통령이 말했다. “호! 누군지 다음 건배사 할 사람 부담스럽겠는데….” 나를 이어 건배사를 한 김병준 정책실장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주제로 멋진 건배사를 했다.

당나라의 정치가 위징.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어서 노 대통령이 역사 이야기를 했다. 정도전 집터가 당시 점쟁이 말로 ‘천자만손’의 터전이라 했는데 몇 백년 뒤 한국 최대의 수송초등학교(지금은 종로구청)가 들어서서 점쟁이 예언이 맞았다는 이야기, 중국 정화의 아프리카 진출 이야기를 한 뒤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벌레라서 여러분은 불운한 사람들이다. 일요일도 일하고, 제주도 가서도 하루 놀고 나면 조바심이 난다. 다음에는 철쭉, 목련 필 때 녹지원에서 파티를 하면 좋겠다. 언론에서 대통령 변했다고들 하는데 안 변했다. 그러나 전 같으면 연설문에 ‘안 변했다’고 쓸 텐데 청와대에 위징이 하도 많아 포기했다. 그것만은 변했다.” 모두 웃었다. 그 뒤 노 대통령이 “요즘 청와대에 위징이 너무 많아 일하기 힘들어!”라는 농담을 가끔 했다고 들었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