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체제와 장르마저 넘나드는 자유인
故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인연도 눈길
(시사저널=심정택 칼럼니스트)
미술사학자이자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 불린 고(故) 서경식(1951~2023) 도쿄 경제대학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 《소년의 눈물》에서 "성장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자부심과 열등감, 희망과 실의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나날들이었다"고 소년 시절을 회고했다.
도예가인 응향(凝香) 박춘숙(66)의 어린 시절도 그랬다. 박춘숙은 유아기를 막 벗어나면서부터 점토를 가지고 놀았다. 외할머니에게 배웠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던 아버지는 딸의 행동을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딸의 손을 잡고 일본 땅을 떠나 고향인 전주로 왔다. 이때가 1960년대 중반이었다. 부친은 딸을 중학교 시절까지 전북 김제와 인근 지역의 옹기 가마터로 데리고 다녔다. 1970년대 중반이던 고교 시절에는 경기도 여주 도자기촌에서 작은 막사발(다완)을 처음 접했다. 부친은 딸이 하는 다양한 경험이 스스로 행복한 삶의 길잡이가 되길 바랐다.
대학교 2학년 때 미성의 목소리 잃어
코스모폴리탄이자 디아스포라 예술가 백남준(1932~2006)은 도올 김용옥과의 대담(1992)에서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이미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모두 흡수한 거거든. 내 속에 가지고 있었던 전통문화와 서양의 아방가르드가 결국 비슷하다는 것을 내가 나중에 발견한 것일 뿐이지." 박춘숙 역시 연세대 성악과에 입학하기 전에 일본과 전주에서 모든 것을 흡수했다고 한다.
한때 박춘숙은 오페라 무대에서 프리마돈나와 디바를 꿈꿨다. 대학 2학년 재학 중 부친의 불행한 죽음은 미성의 목소리를 앗아갔다. 연세대 법대에 다시 입학, 법학도의 길을 가며 꽃꽂이 강좌를 선택 과목으로 삼은 게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플로리스트(florist)의 길이었다. 이후 정치인 김대중(1924~2009), 노무현(1946~2009)과의 인연은 박춘숙에게 영광과 시련을 동시에 안겨주게 된다. 1992년, 서울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가기 위해 런던에서 바꿔 탄 비행기 옆좌석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다. "니혼진데스카?(일본인입니까?)" "아뇨, 과천 사는데요." 박춘숙은 과천에 스튜디오를 두고 단국대 등 대학 도예과에 꽃그릇(花器) 창작 강의를 다녔고, 침봉에 꽂는 동양식 꽃꽂이를 공부하러 네덜란드 HANK플라워 칼리지에 다닐 때였다.
네덜란드는 화훼가 수출 전략산업이다. 김대중은 플라워 디자인 1급 자격증을 가진 박춘숙에게 국내에서도 국제적인 화훼박람회 유치가 가능한지 물었다. 다음 날 꽃박람회를 안내한 게 김대중과 본격적인 인연의 시작이었다. 1996년 고양세계꽃박람회는, 경기도가 일본 도쿄, 중국 쿤밍(昆明)과의 국제꽃박람회 유치 경쟁에서 탈락한 후 자체적으로 출범시킨 이벤트였다. 박춘숙은 조직위원과 집행위원을 겸했다. 박춘숙은 '세계 도자기엑스포 1998 경기도' 특별 자문위원장을 맡으면서 이권단체 개입을 막고, 예산 집행 및 감독을 했다. 엑스포는 600만 명이 관람해 대성공을 거뒀다. 여주는 산업용, 이천은 작가주의, 광주는 실험적 작품을 만드는 정립(鼎立)의 세 축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박춘숙의 작품은 남성적이고 스케일이 크다. 사발, 주전자, 접시, 화병 등 스펙트럼이 넓고 표면에 선홍색 무늬를 연출하는 진사 도자기와 다완, 도조(陶彫·ceramic sculpture)에 가까운 대작 '대웅' 시리즈까지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오래가는 예술의 가치는 노동이 받쳐줘야 한다. 박춘숙은 도끼로 장작을 패고, 도편을 연구하고, 비 오는 날 드러나는 흙 단층을 찾기 위해 트럭 타이어용 튜브를 허리에 감고 절벽을 탔다. 강원도 홍천군 주천강 일대 지표면 수십㎝ 밑에서 황토 찰흙인 쪼대를 채취했다. 작품은 통계와 데이터의 산물이기도 하다. 일본 도자기 자료들을 뒤졌다. 소지(흙), 산화법, 환원법, 소성 온도, 시간 등을 고민했다. 치밀하고 오랜 연구 결과, 소성의 흔적으로 부분부분 투박한 하얀 결로 남은 단면, 마치 매화가 만개한 듯한 다완을 만들었다.
도자기에는 현대미술이 갖는 모든 테크닉이 들어가 있다. 파장이 다른 색, 빛, 온도에 따른 컬러의 변화, 파낸 홈을 다른 흙으로 메우고 유약을 바르는 박춘숙의 작업은 칼질과 붓질이 어울려져 조각적이며 회화적이다.
박춘숙은 주요 행사에 플로리스트로 참여하면서 사회단체 활동도 관여하게 됐다. 2006년 11월 캄보디아 국빈 방문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은 송월주 스님의 '생명의 우물' 사업 현장을 둘러본 후 리셉션장에서 "우물만 파지 말고 북쪽 아이들 빵 좀 구워 먹이라"고 했다. 이후 박춘숙은 북한 어린이를 위한 빵공장 사업에 나선다. 수년 후 안면인식장애 어린이 후원단체 행사장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백남준 선생의 작품은 이해 못 하나 응향 선생의 보리와 억새는 바로 와 닿는다"고 평가했다.
적극적인 사회단체 활동에 주변에서 우려
박춘숙을 아끼는 재계의 컬렉터는 작가의 이런 대외활동을 걱정했다. 박춘숙은 2010년 모 사회단체 주관의 평화통일 기금 마련 초대전, 2018년 해방 정국 최고의 대중정치인 여운형(1886~1947) 선양기금 마련 전시에 각각 200여 점의 작품을 기부했다. 2013년 11월에는 모 사회단체의 대표 자격으로 방북, 완공된 평양시 워터파크인 문수물놀이장, 유방암센터 등을 참관했다. 당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명예욕이 있었음을 토로한다. 북한이 고려청자를 재현했다고 평가받는 도예가 우치선(1919~2003) 기념관을 짓고, 그 후손은 평양의 만수대창작사에서 업을 잇도록 하는 등 도예가를 우대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즈음 인도와 중국 사이에 낀 부탄 왕국을 방문, 현지에 정착할까 잠시 고민도 했다. 흙이 도자기 재료로 알맞았으며 사람들도 선했다.
스승 없이 사숙(私淑)해 경지에 이른 작가는 현재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맡아줄 이를 찾고 있다. 미술관 한편에 전시 공간이 만들어져 후학들에게 전승되고 자신은 평화로운 귀향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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