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J와 함께했던 ABA 마지막 강호 네츠

김종수 2024. 3. 1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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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명문 출신 네츠, 안풀리는 NBA 히스토리①


최근 몇시즌간 NBA에서 가장 안풀리는 팀을 꼽으라면 브루클린 네츠가 빠질 수 없다. 약체 이미지, 오랜 역사에 비해 부진한 팀 성적 등을 탈피하고자 대대적 투자와 개편을 감행했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연이은 사고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캄캄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팀 성적, 이미지, 미래에 대한 방향성 등 어떤 것도 잡지못하고 있는 나날의 연속이다.
 

제임스 하든(342‧196cm), 케빈 듀란트(35·208cm), 카이리 어빙(31·188cm)이라는 역대급 빅3를 내세워 큰 꿈을 꾸기도 했으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너무 공격적인 조합이다’, ‘밸런스가 아쉽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사실 저 정도 이름값이면 해당 조합이 제대로 가동만되어도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3명 모두 한팀의 에이스 혹은 최강 2옵션으로 활약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던지라 돌아가면서 활약만 해줘도 상대팀에서 제어하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전당포 라인업으로 불렸던 구성과 달리 전성기를 지나지 않은 라인업이라는 점에서도 기대가 컸다.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상황에 따라서는 왕조도 가능하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다들 알고있다시피 결과는 최악이었다. 아쉽기는해도 성적은 안나올 수 있다. 농구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하고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츠 빅3는 경기외적인 문제로 잡음이 더 많았고 비싼 몸값의 그들이 함께 뛴 경기는 얼마되지않는다. 결국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해산되고말았다. 이후 하든, 듀란트, 어빙은 각기 다른 팀에서 잘만 뛰고 있다.


물론 이미 지난 일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가 더 중요하다. 문제는 남아있는 유산들마저 희망이 보이지않는다는 부분이다. 동부컨퍼런스 11위(승률 0.391)의 부진한 성적은 둘째치고 미래마저 밝지못하다. 중심에는 벤 시몬스(27‧211cm)가 있다. 빅3를 잃은 네츠는 시몬스를 중심으로 미래를 도모하려했다.


외곽슛 부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있는 선수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젊은 나이와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믿었다. 하지만 시몬스는 전혀 팀에 도움이 되지않고있다. 크고 작은 부상에 수시로 시달리며 몸값만 비싼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다. 지난시즌 42경기 출전에 그친데 이어 올시즌에는 15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남은 시즌은 끝이다.


허리부상으로 인해 더이상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몬스를 중심으로 시즌을 준비한 네츠 입장에서는 복창이 터질 노릇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크 본 감독이 경질되고 현재는 케빈 올리 감독대행 체제로 남은 시즌을 마무리지어가고 있다. 아예 성적을 포기했으면 모를까 돈은 돈대로 쓰면서 성적까지 나쁘고 리빌딩조차 순조롭지않은 상황에 네츠 팬들의 원성은 깊어져만 가는 분위기다.


브루클린 네츠(전 뉴저지 네츠)는 1976년 NBA에 입성했다. 1년만 더있으면 이제 50년이다. 아쉽게도 반세기동안 만들어놓은 히스토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컨퍼런스 우승 2회, 디비전 우승 4회가 내세울수 있는 성적의 전부다. 파이널 우승은 단 한차례도 없다. 적극적 전력강화를 통해 컨퍼런스의 강자로 위용을 뽐낸 적도 있지만 하위권을 전전할 때가 훨씬 많았다.


때문에 팬들사이에서는 약체 이미지가 짙은 편이다. 하지만 네츠가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ABA 마지막 명문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주목받는 신흥 강팀이었다. 1967년 창단한 이래 한동안 고전을 면치못했으나 1973년 부임한 케빈 로커리 감독이 줄리어스 어빙(74‧201cm)을 영입하면서 강팀으로서의 도약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매직’, ‘샤크’ 등과 함께 NBA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별명중 하나인 ‘닥터J‘로 유명한 어빙은 ’마이클 조던 시대 이전의 조던‘으로 불린다.


엘진 베일러가 쇼타임 농구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면, 어빙은 이를 완성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여전히 센터가 중심이었던 프로 무대에서 내외곽을 오가며 펼치는 다양한 테크닉과 화려한 움직임으로 인기와 승리를 모두 가져갔던 흔치않은 스윙맨 슈퍼스타다. 특히 당시 리그내 어떤선수보다도 눈에 뛰었던 다양한 슬램덩크는 수많은 팬들을 설레게하기에 충분했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는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한참 TV가 막 보급되고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던 시절과 타이밍도 잘맞았다. 어빙은 그야말로 덩크 아티스트였다. 사이즈, 파워, 기동성에 더해 점프와 체공력까지 탁월했던 그는 자신의 장점을 십분할용해 상대골밑을 자유자재로 유린했다. 퍼스트스텝이 좋고 흡사 짐승같은 반응속도를 가지고있던지라 조금의 틈만 있으면 벼락같이 수비를 뚫고 림어택에 들어갔다.


당시 농구는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다. 과격한 몸싸움과 온갖 더티한 반칙이 난무했다. 하지만 투사같았던 어빙을 막을수는 없었다. 기술에 더해 힘과 투지까지 좋았던 그는 어지간한 몸싸움에는 꿈쩍도 하지않았다. 거기에 더해 공중에서 수비수와 부딪혀도 중심이 흔들리지않고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었던지라 묘기에 가까워보이는 서커스샷도 자주 성공시켰다.


뭐니뭐니해도 어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덩크슛이다. 당시 공중플레이가 많지않았던 리그에서 어빙은 달랐다. 어느 방향으로든 높이 그리고 오래 뜰 수 있었던 그는 흡사 혼자만 다른 세상에 사는 선수인냥 뛰고 또 뛰며 보는이들에게 독특한 즐거움을 줬다. 큰동작으로 뛰어올라 강하게 꽂아넣는 덩크슛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했다. 이후 조던이 그랬던 것처럼.


두 손으로 림을 내리 찍듯이 누르는 덩크는 물론이고, 한 손으로 공을 잡고서 허공에서 스윙하면서 덩크를 때려박았다. 자유투 라인에서 날아올라 덩크를 내리 꽂는 장면을 1976년 ABA 올스타전을 통해 최초로 전국에 소개한 인물이기도하다. 이같은 어빙의 플레이는 미국농구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다.


하늘을 나는 듯한 퍼포먼스에 심취한 많은 어린이 팬들을 선수의 길로 이끌었고 적지않은 후배들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했기 때문이다. 어빙과 플레이 스타일이 상당부분 비슷했던 조던은 "어빙의 경기를 볼 수 없었다면 내가 펼쳐보인 모든 버전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며 수시로 팬심을 드러냈다. 

 

그랜트 힐 또한 "어린시절의 나에게 어빙은 NBA의 전부로 여겨졌다“는 말로 당시의 위상을 설명하기도 했다. 1970년대 NBA의 인기자체가 많이 높지않아서 신드롬이 일어나지않았을뿐 리그대비 압도적인 최고 인기스타였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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