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도전한 과학자들] ①탈북 공학도 박충권 "연구자 평가 다각화해야"

김진화 기자 2024. 3. 1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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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사이언스는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에 영입된 과학기술인의 목소리를 연재합니다.

이들이 아직 국회에 발을 들인 것은 아니지만 정치에 도전하는 계기, 국회의원이 되면 하고 싶은 것들을 풀어보며 현재 한국 과학기술 현주소를 진단합니다.

지난해 12월 국민의힘이 제22대 국회의원선거(이하 4월 총선)를 겨냥한 1차 영입인재를 발표했을 때 박충권 현대제철 연구개발본부 책임연구원은 남다른 이력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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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권 현대제철 연구개발본부 책임연구원. 김진화 제공.

[편집자주] 동아사이언스는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에 영입된 과학기술인의 목소리를 연재합니다. 이들이 아직 국회에 발을 들인 것은 아니지만 정치에 도전하는 계기, 국회의원이 되면 하고 싶은 것들을 풀어보며 현재 한국 과학기술 현주소를 진단합니다. 정당과 관계없이 이름 '가나다' 순으로 게재합니다. 
 

지난해 12월 국민의힘이 제22대 국회의원선거(이하 4월 총선)를 겨냥한 1차 영입인재를 발표했을 때 박충권 현대제철 연구개발본부 책임연구원은 남다른 이력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올해로 37세인 그는 북한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군사 무기 개발에 특화된 김정은국방종합대학 화학재료공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2009년 탈북 이후 서울대 재료공학부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현재 현대제철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던 그가 어떤 계기로 탈북을 하고 한국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도전하게 된 걸까. 4월 총선 비례대표 후보 출마를 결심한 그를 3월 4일 국회 앞 카페에서 만났다. 

Q. 대기업 연구원이라는 편안한 삶을 놓고 정치에 입문한다. 어떤 결심이 있었나.

"국민의힘에서 입당을 제안받고 제 삶의 궤적을 돌아봤습니다. 제가 탈북할 때부터 북한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어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남북 관계, 통일, 정치 현안 등을 토론하고 연구하는 남북한 청년 지식인 모임에도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북한 내부에서 사회주의 시스템의 문제를 몸소 체득했고 무기 개발 분야 전공자로서 북한 정권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더불어 공학도이자 과학자로서, 한국의 기업 환경을 개선하고 좋은 과학기술 정책을 입안하는 일이라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Q. 새로운 길을 택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북한 이공계 최상위 엘리트였는데 왜 탈북을 결심했나.

"한국의 영재학교와 비슷한 개념인 북한의 제1고등학교를 전교 3위로 졸업하고 김정은국방종합대학(국방대)을 입학했습니다. 당시 김정일 정권이 군사력 강화를 최우선하는 선군정치를 모토로 내걸면서 군 관련 분야의 대학이 가장 우위에 있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학생 간부를 하면서 북한 체제가 돌아가는 본질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 후 나름 탄탄대로던 저의 미래가 암담한 길로 보이고 꿈도 희망도 다 사라져서 탈북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Q. 한국에 와서 서울대 재료공학부에서 석박사 학위를 땄다. 어떤 시간이었나

"한국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원 지도교수님이셨던 강신후 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님의 배려로 연구실 인턴을 경험하고 대학원 입학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에 처음 갔을 땐 완전히 부서지는 느낌이었어요.

북한에서 손꼽히는 대학을 나왔으니 나름 자부심이 컸는데, 국방대는 무기 쪽에 특화돼 있어 배우지 못한 학과 기초과학 과목이 너무 많았습니다.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석사 시절 학부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하루에 4시간도 채 안 자며 공부했습니다.

 
강 교수님은 제게 부모님 같은 분입니다. 교수님은 사회적 약자인 연구자들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해오셨어요. 대학원 학생을 받을 때 다른 교수님들이라면 받지 않을 학생들을 1, 2년에 한 명 정도는 꼭 받으셨습니다.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출신 학생을 비롯해 신장위구르 지역 학생도 있었죠. 이런 학생들이 한국에서 취직하거나 자신의 국가로 돌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부분은 한 사람의 재량이 아닌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공학도로서 어떤 제도 및 정책에 관심이 있는가.

"크게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먼저 기업 환경을 개선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몇 년간 산업 현장에서 일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한국의 기업 규제가 너무 과도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경제가 큰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에 민첩하면서도 백년대계를 내다보는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과학 연구자들의 평가 시스템을 보완하고 싶습니다. 현재는 평가 기준이 논문에 치중돼 있어서 성과를 내기 위해 연구자들은 임팩트 팩터(IF)가 높은 논문을 쓰는 데에 집중합니다.

IF가 높은 논문을 쓰려면 새로우면서도 핫한 분야의 연구를 진행해야 하다보니 대학원생의 전공이 한국 제조업 기반 기업들의 기술과 많이 동떨어져 있습니다. 반도체를 전공하는 연구실이 몇 개 없는 것도 한 예죠. 그래서 기술 이전 실적, 창업 실적, 특허 실적 등을 평가 기준에 비중 있게 반영해 다각도로 연구를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이공계 진로에 막 들어선 청년들, 공학도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도 한 마디 부탁드린다.

"정계 입문을 결심하기 전에 저의 원래 목표는 산업현장 경험을 충분히 쌓고 제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처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장학금 등으로 도움의 손을 뻗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큰 크기로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제가 공학자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사회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과학을 깊게 파고들수록 시야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을 돌아보고 주변 세상을 둘러보면서 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진화 기자 evolut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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