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인간처럼 고통 느끼는 법 | “아픈 경험 기억하는 벌들, 가축처럼 인도적 대우 필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봄은 2월 말부터 피는 아몬드꽃으로 시작한다. 3200㎢가 넘는 면적을 차지한 아몬드 농장들이 하얗거나 연분홍색 꽃으로 덮이면 수백억 마리 벌을 실은 트럭들이 몰려온다. 벌에게 꽃가루받이를 시키려는 것이다.
벌들은 흔들리는 트럭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모른다. 최근 벌도 인간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간을 위해 일하는 벌도 인도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상처 치료 행동은 고통 느낀다는 증거
영국 퀸메리대의 동물행동학자인 라스 치트카(Lars Chittka) 교수는 최근 논문 사전 출판 사이트인 바이오아카이브(bioRxiv)에 “뒤영벌(Bombus terrestris)이 다친 부위를 손질하는 모습은 통증을 느낀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아직 정식 심사를 거치지 않아 학술지에 실리지는 않았다.
뒤영벌은 꿀벌과 마찬가지로 꽃가루를 옮기는 이로운 곤충이다. 꿀벌 개체 수가 급감하면서 국내외 과수 농가에서 꽃가루받이에 많이 이용한다. 검고 통통한 몸집에 주황색 띠가 있어 귀여운 모습이다. 영어로는 범블비(bumblebee)라고 한다. 영화 ‘트랜스포머’ 에 나온 귀여운 노란 자동차 로봇이 바로 범블비다.
연구진은 뒤영벌 82마리를 세 무리로 나눴다. 한 무리는 섭씨 65도로 가열한 인두로 더듬이를 건드렸다. 다른 무리는 가열하지 않은 인두로 건드렸고 마지막 무리는 가만히 뒀다. 가열한 인두에 화상을 입은 뒤영벌은 2분 동안 다른 무리의 벌보다 더 자주 오래 더듬이를 손질했다.
영국 사우샘프턴대의 헤더 브라우닝(Heather Browning) 교수는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여덟 가지 기준을 개발했는데, 이번 연구는 ‘부상과 위협에 대한 자기 보호 행동’을 다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다른 과학자는 뇌가 손상된 개구리도 몸에 묻은 산성 용액을 발로 닦으려 한다는 점에서, 상처를 손질한다고 반드시 통증을 감지하는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보상 얻으려 고통 감내하는 행동 보여
뒤영벌이 통증을 감지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벌이 생각보다 지능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이 잇달아 밝혀지면서 나왔다. 뒤영벌은 플라스틱판 사이에 낀 꽃을 얻으려면 끈을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앵무새나 까마귀가 지능이 있음을 확인하는 실험에서 자주 쓰는 방법이다. 뒤영벌은 먹이가 근처에 있어도 공놀이에 더 집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사람처럼 어린 개체이거나 수컷일수록 놀이에 더 빠졌다. 치트카 교수는 뒤영벌이 지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즐거움이라는감정도 느낀다면, 고통도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퀸메리대 연구진은 2022년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그 증거를 제시했다. 브라우닝 교수가 제시한 동물의 고통 감지 기준 중 하나인 이른바 ‘주고받기(tradeoff)’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즉 벌은 보상이 충분하다면, 고통을 감내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뒤영벌 41마리에게 설탕물이 많이 든 먹이통과 적은 먹이통 중 하나를 택하게 했다. 벌들은 당연히 설탕물이 많은 쪽으로 갔다. 다음에는 고품질 먹이통에 있는 노란색 판을 섭씨 55도로 데웠다. 이 정도면 뜨겁지만 다칠 정도는 아니다. 벌은 역시 고품질 먹이통을 택했다. 말하자면 음식이 담긴 접시가 뜨겁다고 내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중에 두 먹이통 모두에 고품질 먹이를 주자 뒤영벌은 앞서 온도가 높았던 노란색 판이 있는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 고통을 기억한다는 말이다. 치트카 교수는 2008년 ‘커런트 바이오롤지’에 “뒤영벌이 천적인 게거미에게 잡히는 경험을 하고 공포 기억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게거미 모형의 꽃에 앉은 뒤영벌을 잡았다가 풀어줬다. 나중에 뒤영벌은 꽃에 앉기 전에 게거미가 있는지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가끔은 안전한 꽃에도 내려앉기를 포기하는 행동을 보였다. 사람으로 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과 비슷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가축처럼 곤충도 인도적 대우 필요
치트카 교수는 곤충이 지각이 있고 통증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가축과 같은 인도적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재미 삼아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과학자가 곤충에게 극심한 통증을 줄 만한 실험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곤충 산업에서도 인도적 대우가 필요하다고 치트카 교수는 말했다. 세계식량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100대 농작물 중 71종이 꽃가루받이를 벌에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살충제 남용으로 인해 200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유럽, 호주 등지에서 꿀벌이 네 마리 중 한 마리꼴로 사라지는 이른바 ‘꿀벌 군집 붕괴 현상’이 벌어졌다.
꿀벌이 사라지자 뒤영벌을 인공 사육해 꽃가루받이에 쓰고 있다. 치트카 교수는 밀폐된 상태로 트럭에 실려 전국 곳곳의 농장을 찾아다니는 벌들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곤충을 농업이나 식품에 활용하더라도 가축처럼 인도적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인도적 대우를 받는 동물이 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어나 바닷가재를 산 채로 끓는 물에 넣고 삶지만, 해외에서 그렇게 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스위스는 2018년 동물보호법을 개정해 살아있는 바닷가재를 끓는 물에 넣으면 처벌받도록 했다. 전기 충격을 주거나 망치로 때려 고통 없이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2013년 영국 퀸스대 연구진은 전기 충격 실험을 통해 게와 새우 같은 갑각류도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LSE) 연구진은 2021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문어·오징어 같은 두족류와 바닷가재·게가 포함된 십각목 갑각류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지각 있는 존재(sentient being)’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이를 반영해 문어, 게가 고통을 느끼는 존재여서 동물복지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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