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심(心心)파적 <51>] ‘과연 돌(石)에도 피가 돌까?’ 펫 록(Pet Rock)의 심리학
1975년 미국의 게리 달이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재미있는 발상을 했다. ‘애완동물을 키우려면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그냥 돌을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리는 내친김에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세상에 널린 게 돌인데, 하찮은 돌을 팔겠다고? 평양의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사람들은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펫 록(Pet Rock)’ 즉 ‘애완돌’이란 이름을 붙인 이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게리는 6개월 동안 개당 4달러짜리 제품을 500만 개 이상 팔아 백만장자가 됐다.
이 애완돌이 일본을 거쳐 요즘 한국에서꽤 팔리는 모양이다. 예쁘게 치장을 한 돌멩이에 돌집이나 돌줄 등 각종 액세서리를 패키지로 해서 판다고 한다. 상품 안내서에는 애완돌을 구입한 후에는 잘 보살펴 주고, 가끔 줄로 묶어 산책도 시키고, 밤에는 집에다 넣어두라는 등의 지침이 담겨있다고 한다.
게리의 말처럼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은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매 끼니를 챙겨야 하고, 정기적으로 예방주사도 맞혀야 한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밟는 것도 인간과 다르지 않다. 어쩌다 병이 들면 의료비도 무척 비싸다. 유기견이 적지 않게 생겨나는 이유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 죽음에 이르면 이별의 상처도 오래간다. 예전 내 직장 동료의 동생은 10년 이상 키우던 개가 죽자, 상실감과 공허감을 못 이겨 전문가의 상담을 꽤 오래 받아야 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산 어린 병아리나 오리 새끼를 분양받아 왔다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고 사육을 부모에게 미루거나 심지어 유기하는 경우도 있다. 내 딸은 초등학생 시절 강아지를 입양하겠다고 한사코 주장하다가, 동물 털 알레르기 진단을 받고서야 포기한 적이 있다. 딸은 친구 집에서 받아온 구피 몇 마리를 자기가 잘 키우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작심삼일이었다. 그 후로 번식력 강한 구피에게 먹이를 주고, 낳은 새끼들을 분양하는 일은 결국 나의 몫이 됐다.
교감 가능한 '애완돌'
하지만 애완돌은 다르다. 먹지 않으니, 배설도 없다.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문제로 상처를 받을 일도 없다. 반려동물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처럼 ‘소통과 교감의 행위가 불가능한데 애완돌이 웬 말이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나는 애완돌과도 충분한 교감 행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를 잘 살펴보라. 아이들은 무생물인 장난감에 인성(人性)을 부여한다. 이름도 지어주고, 대화할 때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 아이들은 이 과정에서 타인과 대화하고 협력하는 방법을 연습한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조절하는 방법도 배운다. 놀이의 규칙도 배운다. 장난감 놀이는 그만큼 아이들의 성장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어른들에게 애완돌은 좋은 장난감이다. 애완돌에 인성을 부여하고 서로 교감을 하게 되면, 실제 인간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어느 정도 풀 수 있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료나 주변 지인들에게 시시콜콜 말하기가 거북할 때, 애완돌에 고해성사를 하듯 풀어 놓으면, 의외로 기분이 풀리는 경우가 있다.
인류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애니멀'
특별히 우리 인류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애니멀(storytelling animal)’이다. 인간의 뇌는 이야기를 만들고 이해하고 처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이야기를 만들고 공유하는 능력은 사람들에게만 쓰이지 않는다. 우리는 장난감이나 애완돌 같은 인성을 부여한 사물에도 우리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감정을 공유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낸다. 아닌 말로 우리 인류는 ‘공감하고 싶어 안달이 난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고많은 사물 중에 우리는 왜 하필이면 돌에 꽂히는 것일까. 우리 인류는 동물이나 식물 혹은 암석 등의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애니미즘(animism)은 전 세계 많은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광범위한 신념 체계다. 애니미즘적 사고는 보편적이다. 그중에도 특히 주변에 흔히 볼 수 있고, 도구로도 쓰이는 돌에 주목했다.
류는 원시시대 때부터 돌에는 생명을 주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돌에서 인간이 태어날 수도 있고, 인간이 성스러운 돌로변화할 수 있다고 믿은 적도 있었다. 그만큼 인간은 돌에서 안정성, 신뢰성, 영속성을 느낀다. 건축자재로서의 내구성도 이런 사고 형성에 한몫했을 것이다. 전 세계의 오래된 종교적 유물 가운데 석상이나 석탑 등이 많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良工)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있는 법열(法悅)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청록파 시인 동탁 조지훈 선생의 ‘돌의 미학’이란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시인은 경주 석굴암 안에 있는 석상을 보고 돌에서 숨결이 느껴지고, 핏줄이 통한다고 말했다. 애니미즘의 본질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잘 묘사한 표현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게리 달이란 미국 사람이 1970년대에 만든 애완돌이 반세기가 지나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1996년 일본에서 만들어져 오랜 기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다마고치’ 라는 사이버 애완동물이 떠올랐다. 이 장난감은 기계 안에서 가상의 애완동물을 키우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일종이다.
다마고치 역시 애완돌과 마찬가지로 실제 현실에서 인간관계의 형성 유지가 어렵거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 손이 많이 가고 힘이 든 현실에 착안했다. 사이버 세계에서 손쉽게 애완동물을 키우도록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애완돌은 실제 자연에서 가져온 돌을 단순히 가공한 데다가 움직이지 않는 돌멩이다. 동적이고 인공적인 다마고치보다는 더 정적이고 자연에 더 가깝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애완돌은 기본적으로 돌이라는 사물이 가지는 안정성과 영원성이라는 상징적인 속성이 무의식적으로 인간에게 어필한다. 또한 복잡다단한 현대의 물질문명의 한복판에서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위로와 힐링을 제공한다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애완돌이 현실 사회에서 사람들과의 실질적인 사회적 관계 형성에 실패한 사람들의 도피처로 선택된다면 곤란하다. 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실화를 예로 들어보자. 2015년 서울 강남의 한 집 안에 불이 났다. 그런데 그 집 딸이 90세 노모는 놔두고 기르던 개만 데리고 탈출하여 국민적 분노와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심리학적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본성을 어루만지는 효과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반려동물을 기르고, 다마고치나 애완돌을 기르는 행동은 좋은 힐링 효과가 있고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본다. ‘반려동물’이란 명칭은 인생을 함께하는 반려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용어다. 애완동물의 ‘애완(愛玩)’이라는 말도 사랑하고 가까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찌 반려동물, 애완동물이 피를 나눈 친부모보다 우선순위에 놓일 수가 있는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지켜야 할 원칙과 상식이 무너질 때 우리 사회는 나아갈 길을 잃고 미망(迷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애완돌이나 반려동물을 기르고 함께하는 행위 역시 이러한 원칙과 상식의 범주 안에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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