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도의 음악기행 <80>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미제레레’] ‘영원의 도시’ 로마의 불변하는 음악
최근에 한 해외 유튜버의 한국 여행기를 담은 영상을 보았다. 독일 출신의 유튜버는 한국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며 특히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디한 도시 분위기에 감탄한 듯 보였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도심 거리의 풍경은 해가 지나가기가 무섭게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하는 매장들로 바뀌어 간다. 문화, 의류, 식음료 등 여러 분야에서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는 소비 패턴과 더불어 한국만의 편리한 라이프스타일은 해외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례일 것이다. 이런 다이내믹한 한국의 라이프스타일은 K컬처로 대변되는 한류가 세계 문화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주류 문화로 성장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물론 한국에 잠시 머문 유튜버의 시각에 이런 다이내믹한 트렌드의 변화 뒤에 숨겨진 치열한 경쟁, 자영업자의 고충, 사회적 갈등 등이 얼마나 반영돼 있는지는 모르겠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필자는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의 삶을 살고 있다. 적게는 100년 많게는 350년 전에 작곡된 작품을 주로 연주하는 필자에게 변치 않는 과거의 음악과는 반대로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현재의 세상은 때론 엄청난 간극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은 다분히 이질적이기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창의적인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삶을 반추하고 헤쳐 나가는 나침반이 돼 주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생각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적응하는 동안 지켜나가야 할 내적 자아와의 갈등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추측한다. 이와 같은 갈등은 정신없는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을 사는 필자에게 뭔지 모를 ‘영원함’이라는 것에 대한 목마른 갈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수없이 바뀌는 동안, 우리의 자아를 지켜주며 불변할, 영원히 지속할 삶의 가치라는 게 있을지 말이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던 찰나, 지난 2월 잠시 이탈리아 로마에 방문할 일정이 있었다. 로마는 ‘영원의 도시’로 불리는 곳이 아니던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수천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등 찬란한 예술 사조가 꽃 피울 때마다 그 중심 무대 역할을 한곳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지금도 로마 거리 곳곳에는 베르니니,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헤아릴 수 없는 과거 수많은 천재 예술가의 숨결이 담긴 작품들이 영원히 숨 쉴 것 같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이런 곳이라면 빠르게 변화하는 삶 한가운데에서 방황하는 필자에게 어떠한 답을 줄 수 있지는 않을까.
그 물음과는 별개로 이탈리아 또한 다이내믹하고 정열적인 정서의 나라로 유명하다. 높은 목소리의 볼륨과 더불어 온갖 손동작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거리 곳곳에는 유쾌함, 분노, 사랑 등 감정에 솔직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또 성격이 급하기도 한지 차가 조금이라도 느리면 뒤의 수많은 차가 그에 질세라 경적을 울리고, 길을 건너는 보행자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아찔하기까지 했다. 필자가 한때 오래 거주한 독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차와 오토바이를 피하며 오밀조밀한 골목을 걷다가 문이 살짝 열린 이름 모를 작은 성당에 이끌려 잠시 숨을 고르려 들어왔다.
어두운 성당 내부는 군데군데 켜놓은 은은한 촛불 빛이 금빛 제단 장식에 반사돼 온화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내부에 설치된 스피커로 나지막하게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조용히 귀 기울여보니 로마 출신의 작곡가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가 작곡한 ‘미제레레’였다. 미제레레는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 있는 성가로서 같은 제목으로 여러 작곡가의 작품이 있지만 특히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작품이 유명하다. 이유는 이 곡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9명의 성악가가 아카펠라로 부르는 15분 길이의 곡으로서, 특히 소프라노 선율의 움직임이 정적이지만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1638년쯤 교황 우르비노 8세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성주에 사용할 음악을 알레그리에게 의뢰했다고 한다. 이후 교황은 이 음악이 시스티나 예배당을 제외하고 그 어떤 곳에서의 연주도 금했으며, 심지어 악보의 사본을 외부로 유출하는 자는 파문하겠다고까지 선언하며 이 음악을 기밀로 유지하고자 했다. 이 아름다움이 오로지 자신의 예배당에서 영원히 홀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길 원했던 것일까. 하지만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소문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심지어 그 음악을 듣기에 너무도 간절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1세는 빈에서 교황청으로 사신을 파견해 악보를 사보할 수 있기를 간청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승인된 악보 사보 세 부가 교황청 승인 아래 반출될 수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아름다움마저 반출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이유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노래 표현 방식, 선율의 장식음 등 악보에 적혀 있지 않은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성주간인 1777년 4월 14일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함께 시스티나 예배당을 찾았다. 여기서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들은 아들 모차르트 또한 이 음악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되고, 숙소로 돌아와 단 한 번만에 자신이 당일 들은 음악을 기억해 내 필사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이는 조금 과장된 에피소드라는 의견도 있으나, 당시 모차르트는 이 일로 인해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사보를 유출한 자는 파문이라는 엄벌이 있다고 하지만 어린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감복한 당시의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그에게 황금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이후 모차르트의 사보는 런던으로 전해져 교정 작업 후 출판되었고 이는 ‘미제레레’가 대중화된 계기라고 전해진다.
다음 날 시스티나 예배당을 찾았다. 미켈란젤로의 역작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그림에서 묘사된 수많은 인물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예배당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알레그리의 ‘미제레레’는 이곳에서 성주간마다 점화된 촛불이 하나둘씩 소거되는 가운데 조용히 연주됐다고 한다. 이 곡이 연주되는 동안 교황을 포함해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삶에 대해 그리고 그간 지은 죄에 대해 명상하고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적어도 음악이 흐르는 순간만큼은 미켈란젤로 프레스코화에 담긴 인물들도, 바깥세상에 쉴 새 없이 흐르는 번뇌도 잠시 그 동작을 멈추고 영원의 순간을 음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당시의 장면을 상상해 본다.
육신을 지닌 이에게 영원이라는 단어가 과연 얼마만큼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미제레레’를 들으며 현대사회의 빠른 변화에 지친 삶을 지나는 우리의 시간을 잠시 멈추어 보면 어떨까. 시간이 멈춘 바로 그 순간이 육신을 지닌 자가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영원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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