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HRD 전문가에서 연극 연출가로···“연기로 여유·성장의 힘 느끼길”
연극연출 꿈꿨지만 현실 장벽에 교직 선택
교수법 갈증에 석·박사 도전···HRD 전문가로
퇴직 후 찾은 평생학습관서 연극 꿈 실현 계기
연극 연출하며 시니어 내·외면 변화 이끌어 보람
소년의 꿈은 연출을 하는 것이었다. 방송사 엔지니어로 일하던 아버지 덕에 촬영장을 직접 볼 기회가 생길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감독의 “액션” 소리와 수신호 몇 번에 출연자들은 극 중 인물이 진짜로 자기 자신인 양 연기에 몰입했다. 현장에 있던 수십 명이 쏟아낸 시간과 노력이 시청자를 울고 웃기는 프로그램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보며 소년의 꿈은 더 커져만 갔다.
소년은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연극학과에 진학했다. 꿈과 현실엔 괴리가 있는 걸까. 극단에서 활동하는 선배들을 보니 먹고사는 문제가 만만치 않아보였다. 생계를 걱정하면서까지 꿈을 좇을 용기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학력고사를 치렀다. 25세 나이에 영어교육과 새내기 대학생이 됐다.
마음 한편엔 연극을 향한 갈증이 계속 남아있었나 보다. 학교에서 연극반 지도하고 교사로 구성된 극단의 상임 연출가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교사 역할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연극에 관한 열정은 잠시 접어둬야 했던 그는 2019년 퇴직을 한 뒤에야 비로소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긴 시간 ‘부캐(부 캐릭터)’로만 미뤄둬야 했던 연극연출을 ‘본캐(본 캐릭터)’로 끌어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극단 ‘액시’의 예술감독 이정래(66)씨 이야기다. 라이프점프는 지난달 28일 경기 수원시의 한 카페에서 이씨를 만나 그의 연극에 관한 열정과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생업’으로 삼는 것은 포기했지만 ‘부업’으로라도 즐기고 싶었던 연극. 이씨는 경기 남양주시의 한 고등학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하자 바로 연극반부터 만들었다. 그가 맡은 연극반은 곧 ‘연극을 잘 한다’고 입소문이 났다. 나가는 대회마다 입상하는 등 이름을 날렸다. 그의 지도를 받고 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한 제자도 12명이나 된다. 소위 말하는 불량학생이 “연극을 만난 뒤 삶이 바뀌었다”며 이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고.
학교도 이씨의 활동으로 생긴 변화를 반겼다. 시골 고교에 갓 만들어진 연극반이 도시에 있는 쟁쟁한 학교와의 경쟁에서 이기니 연극반은 학교의 자부심이 됐다. 학교는 이씨를 담임 업무에서 제외해주면서 그가 연극반 지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모든 노력을 연극에 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교사로서 연차가 더해갈수록 연극 외의 가르치는 것에 관한 욕심도 커져갔다. 어떻게 해야 더 잘 가르치고, 학습자들은 더 잘 배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렇게 교육공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밟은 그는 42세에 철도경영연수원 행정연수부의 교육 운영 주임교수가 됐다. 그 후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연수원(현 지방자치인재개발원), 전라남도 공무원교육원 등 인재개발(HRD) 분야에 19년간 몸담았다. 61세가 되던 해에 퇴직할 때까지 연극 연출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지만 항상 안테나는 연극 쪽을 향해 세워뒀다.
“연극이 너무 하고 싶었지요.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틈만 나면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가곤 했어요. 교회에서 하는 스킷(짧은 연극)도 잠깐씩은 했어요.”
이씨는 잠시 일을 쉬던 2014년경 경기 수원시 평생학습관의 ‘뭐라도학교’에서 개설한 ‘인생 2모작을 위한 인생수업’을 들었다. 뭐라도학교는 일종의 시민 주도 학습공동체다. 자신이 가진 삶의 경험과 지혜를 토대로 강의를 제안하면 수요자가 있을 때 해당 강의가 개설되는 식으로 운영된다. 연극이 ‘고팠던’ 그는 뭐라도학교에 시니어 극단을 창단하자고 제안했다. 베이비부머로서 동년배들이 은퇴한 뒤 사회와 가정에 다시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는 문제나 세대 갈등 등을 연극을 통해 풀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씨가 다시 취업을 하게 되면서 그의 제안은 물거품이 되는 듯 했다.
“아직도 날짜를 생생하게 기억해요. 2019년 11월 30일이에요.”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다시 뭐라도학교를 찾았다. 5년 전 그의 제안을 실현시킬 가능성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2020년 시니어가 중심이 되는 극단 ‘액시’가 시작됐다. 시니어 연극은 그가 과거에 해왔던 연극과는 조금 달랐다. 시니어들은 신체 노화나 기억력 감퇴 때문에 일어나는 실수를 두려워했다. 소외감이나 강박, 두려움을 떨치도록 공감하는 것이 중요했다. 극단 운영에 전문성을 더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는 노인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과 역할극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을 땄다. 액시는 2021년 미국 동화를 각색한 ‘너는 특별하단다’를 창단 공연작품으로 올린 것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4년째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연극의 어떤 점이 이씨를 이토록 사로잡았을까. 그는 “연극은 참여자의 변화를 돕는 교육”이라며 “공연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진 각기 다른 개성의 구성원이 모여 교류하며 성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극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이나 삶의 여유를 얻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의지도 북돋울 수 있다는 것. 이씨는 그가 지도한 시니어들의 삶도 변화가 나타났다고 했다. “한 시니어 배우는 남 앞에 서는 걸 부담스러워해 숲해설사 자격증을 따놓고도 묵혀뒀대요. 연극을 한 뒤로 용기가 생겨 숲해설사 직에 지원해 다시 출근을 시작했답니다.”
이씨는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겠느냐’는 염려는 접어두라고 했다. 그는 “시니어는 순발력이나 정보처리 능력이 뒤떨어질 수 있지만 경험에 바탕을 둔 통찰력이나 노하우가 뒤처지는 부분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극을 배우는 과정에서 발성이나 발음 훈련을 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신체 조건이 나아지는 현상도 경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요즘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액시를 일본의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처럼 인정받는 시니어 극단으로 키우는 것이다.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는 2006년 창단해 2021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해단할 때까지 많은 호평을 받았다. 평범한 시니어들이 인생의 혼을 담은 연기를 펼치자 해외 각국에서 초청을 받을 만큼 이름을 날린 것이다.
그는 “다른 시니어들도 연극을 통해 내면과 외면이 변화하는 것을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정예지 기자 yeji@lifejump.co.kr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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