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숏폼’이 끝나고 난 뒤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요거 해야 한다, 이런 거 좀 가르쳐줘요.” “일단 눈 뜨면 숏폼부터 시작하지 않나…….” 이효리와 샤이니 키가 묻고 답한 대화다. 설현은 “쇼츠는 제 육체예요”라며 어딜 가든 뭘 하든 ‘쇼트폼’(숏폼)과 함께였다. 숏폼을 볼 수 있어 지하철을 애용한다면서, 연예인인데 시선이 불편하지 않냐는 우려에는 “신기하게 다들 쇼츠 보고 있던데요”라고 대답했다. 나도 이 장면들을 숏폼으로 봤다.
번화가엔 탕후루나 마라탕이, 방에는 술이나 게임이나 향정신성의약품류가 있다. 그리고 우리 손에는 숏폼이 있다. 중독을 권하는 사회, 중독을 부르는 시대다. 틱톡, 유튜브(쇼츠), 인스타그램(릴스),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을 중심으로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숏폼의 마성은, 에스엔에스(SNS) 활동을 피해 다니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미쳤다. 숏폼을 보느라 밤을 설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짧은 분량으로 재미와 정보는 물론, 알고리즘으로 내 성향까지 파악해 자동 추천 동영상이 줄지어 재생된다. 그러니 한번 보기 시작하면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한 호흡의 길이, 단속적인 반복, 터치의 리듬, 무한 자동 재생, 도파민의 최대치, 몰입과 망각의 특성은 중독을 부른다. 밀어 올리는 한 번의 터치가 시작되면 본래의 목적을 잊고 터치의 노예가 된다. 한 번의 터치에 전 분야별, 전 지구적, 전 장르적으로 기상천외한 영상에 생각을 잊고 나를 잊고, 시간은 물론 공간조차 잊곤 한다.
3초가 30분에서 3시간으로, 1분이 10분에서 2~3시간으로 지나가는 건 순식간이다. 그 순식간에 수백 개의 숏폼을 봤건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자동 터치 외에는 숨도 쉬지 않은 듯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내내 내 뇌는 텅 빈 스크린에 불과했다. 시집 한 권을 읽을 시간을, 나인 나를, 도둑맞은 것이다.
20세기 끝에서 나는 “청춘의 끝을 예감하고 나서부터였다지 여자의 천길 마음속에 찬바람이 휙휙 지나갈 때마다 얼굴에 금이 가며 삼초 후가 보이는 거야 똑딱, 똑딱, 똑딱, 하는 순간을 먼저 보는 거지”(정끝별, ‘삼초 먼저 보는 여자’)라는 시를 썼다. 이 시를 쓸 때 나는, 시인으로서의 내가 예감하고 예시하고 예견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먼저 지각하고, 먼저 사유하고, 먼저 고통스러워하고, 먼저 우는 능력이 시인으로서의 불안이자 공포이자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 꼼짝없이 숏폼을 보는 나는, 숏폼의 행렬에 예속되고 예인되고 예정된 채 ‘삼초만 보는 여자’가 되어가고 있다.
올해의 소비 키워드 중 선두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다. 연관 키워드 ‘분초사회’, ‘도파민 중독·해독’, ‘자극 양극화’의 바탕을 이룬다. 가장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내고, 더 똑똑한 선택을 하고, 더 강력한 도파민을 터뜨리고 싶은 욕망이 담긴 키워드들이다. 이 시성비 최대치가 숏폼이다. 플랫폼에 따라 숏폼의 이름, 길이, 형식, 주제는 다양하지만, 최소의 시간, 최대치의 자극, 최대치의 조회수를 향해 진화 중이라는 점은 일치한다. 광고를 벤치마킹하는 그 소통 방식은 신속한 회전, 직관적 소통, 최대한의 생략과 요약, 간결한 하이라이트를 특징으로 한다. 목표는 보는 자의 감각과 정서와 신경을 사로잡는 일이다.
그런데, 이 숏폼을 2~3시간 보고도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면, 도둑맞은 시간과 멍한 두통이 전부라면, 우울감이나 불면 혹은 허전함이나 무감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시성비 최대화를 지향하는 숏폼이 시성비 제로라는 아이러니한 결과에 도달한다. 숏폼으로 상징되는 이 ‘속도의 독재’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시성비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말초적인 숏폼들에 중독된 열등한 뇌를 자발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숏폼과 같은 파괴적인 몰입과 순간적인 쾌락에 지속해서 노출될 때 도파민 과다 분비, 팝콘 브레인(강한 자극만 추구하는 상태), ADHD(주의력 결핍)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경고가 예사롭지 않다. 가장 자극적인 것을 경험하면 그 이외 자극에는 반응이 없기 마련이다. 그러니 시간도 노력도 전혀 필요 없는 이 숏폼 문화가 우리의 뇌를 ‘텅 빈’ 스크린으로 만드는 건 분명하다. 이러한 과몰입은 교감과 소통과 생각과 경험을 쌓고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일수록 더욱 위험하다. 인공지능의 뇌는 날로 발전해가는데, 우리 미래의 두뇌들이 텅텅 비어간다면?
‘라떼’의 20세기 시인은 숏폼의 행렬이 끝난 뒤 엄습해오는 허무함에 ‘연극이 끝나고 난 후’라는 노래를 “숏폼이 끝나고 난 뒤~”로 개사해 흥얼거리고 있다.
시인·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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