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은 춤추며 떠났지만...KBS가 강제종료시킨 '청년여성 MC' 실험
"방방곡곡 누비며 많은 걸 배워... 잊지 않겠다"
녹화 후 방청객이 꽃다발 주고 "애썼다" 함성도
KBS 교체 이유 밝힌 뒤 이어진 잡음
KBS1에서 시청률 이유로 진행자 교체? 아이러니
"청년, 여성에 새로운 시청자 만날 시간 줘야"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9일 오후 인천시 서구 인재개발원 운동장. KBS1 '전국노래자랑' 진행자에서 하차하라는 돌연한 통보를 받고 마지막 녹화에 나선 김신영(41)은 이렇게 말하며 방청객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녹화가 끝나자 한 방청객은 꽃다발을 그에게 건넸다. "김신영 애썼다"는 방청객의 함성도 울려 퍼졌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는 김신영의 품에 안긴 채 좀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김신영은 "마지막 기억이 따뜻해서 너무 좋다"며 "봄볕 받으며 함께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거듭 고마워했다.
양희은의 '마지막 응원'
급성후두염에 걸린 김신영은 '전국노래자랑' 마지막 녹화를 열정적으로 이끌었다. 60대 출연자가 무대에 벗어둔 신발을 들고 함께 깡충깡충 뛰며 춤도 췄다. 그는 녹화 두 시간 내내 무대를 한 번도 떠나지 않고 방청객과 초대 가수의 흥을 돋웠다. "'전국노래자랑' 주인은 여러분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전국의 주인공분들이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수 양희은이 녹화장을 찾아 마지막 무대를 응원했다. 아내와 함께 온 방청객 황찬호(60)씨는 "김신영 마지막 녹화라고 해서 와 봤다"며 "재미있게 보고 있었고 (진행도) 점점 나아지고 있었는데 하차한다고 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신영의 마지막 녹화분은 24일 방송된다. 고(故) 송해의 후임으로 2022년 10월 방송부터 진행을 맡은 뒤 1년 5개월여 만의 하차다.
KBS는 이로써 '청년 여성'을 진행자로 내세운 '전국노래자랑'의 실험을 끝냈다. ①시청률 하락 ②시청자 민원 등에서 나타난 프로그램 경쟁력 하락 우려가 명분이었다. KBS에 따르면, 송해가 2019년 3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진행한 '전국노래자랑' 평균 시청률은 9.4%(이하 수도권 기준)였지만, 김신영이 진행한 1년 5개월간의 시청률은 4.9%였다. 김신영이 2022년 10월 진행을 맡은 뒤 이달 초까지 시청자상담실에 전화·이메일로 616건의 불만이 접수됐다. KBS는 지난 7일 "시청률 하락이 MC 한 명으로 인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44년 전통 프로그램의 위기 앞에 타개책의 일환으로 진행자 교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젊은 여성 홀대' 비판 나온 배경
KBS가 김신영 교체 이유를 이렇게 '숫자'로 밝히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KBS가 그간 송해 선생 후임으로 책임감을 떠안고 프로그램을 이끌어 온 진행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문화다양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봤어야 한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공영방송 KBS 중에서도 KBS2와 상업광고를 받지 않는 KBS1은 다르다. 시청률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공익과 직결되는 시사·교양 분야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것이 소명인 KBS1에서 시청률을 이유로 프로그램 진행자를 돌연 교체하는 건 아이러니란 지적이 많다. '전국노래자랑'은 KBS1에서 전파를 탄다. 한석현 YMCA 시민중계실장은 "1년 반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진행을 맡은 김신영과 30여 년 동안 프로그램을 이끈 송해 선생의 시청률을 비교해 책임을 지게 하는 게 과연 공정한가"라고 반문하며 "여성, 그리고 청년 단독 진행자가 드문 방송 현실을 감안하면 그들을 통해 새로운 시청자들을 만들어 나갈 시간과 기회를 주는 것도 공영방송의 책무"라고 꼬집었다. 10일 기준 KBS 주말 예능 '1박2일'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불후의 명곡' 등 3개 프로그램에서 고정 출연하며 진행을 맡는 연예인 10명 중 여성은 1명(10%)이다. '놀면 뭐하니?' '전지적 참견 시점' '복면가왕' 등 MBC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 진행자 비중이 38%(13명 중 5명)인 것과 비교하면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KBS의 김신영 교체를 두고 '젊은 여성을 홀대한다'는 비판이 나온 배경이다.
반복된 '석연찮은 이별'에 쌓인 불신
논란이 불거진 데는 공영방송에 대한 시청자의 불신이 쌓인 영향도 적지 않다. 그간 KBS의 진행자 교체 과정에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불공정 제작 관행을 조사하려 2018년 꾸려진 'KBS 진실과미래위원회'에 따르면, 윤도현이 2008년 '윤도현의 러브레터'와 '윤도현의 뮤직쇼'에서, 김구라가 '김구라 이윤석의 오징어' 진행자 자리에서 내려온 배경엔 이명박 정권 때 작성된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있었다. 명단에 포함된 두 사람에 대한 '외압'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박민 사장 체제 출범 이후 시사프로그램 '더 라이브'가 편성에서 빠지는 등 KBS 프로그램 개편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2019년부터 '뉴스9'를 4년 동안 진행한 이소정 앵커도 지난해 11월 시청자에게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교체됐다. '석연찮은 이별'이 KBS에서 반복되다 보니 김신영 교체에도 억측이 들끓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언경 뭉클미디어 소장은 "송해 선생 시절의 '전국노래자랑' 시청률은 '본방 사수'가 옛말이 된 미디어 환경에선 누가 진행자가 되더라도 기대하기 어렵다"며 "새 진행자인 남희석이 진행을 맡은 뒤 1년 5개월 후 시청률이 답보 상태라면 김신영처럼 똑같이 교체할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아울러 "'뉴스9' 등에서 여성 진행자를 교체하고 '전국노래자랑' 진행자를 다시 중년 남성 방송인으로 바꾼 것은 공영방송이 보수화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덧붙였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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