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사연] 아침 이슬처럼 맑던 그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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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학로의 학전소극장이 15일 문을 닫는다.
운영난뿐 아니라 대표이자 가수인 김민기가 암 투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민기의 대표곡으로 1971년 양희은이 부른 '아침 이슬'은 진보 진영의 상징적인 노래가 됐다.
결국 김민기는 1990년대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1991년 학전소극장을 세웠고, 1993년 음반을 발표했는데 이때도 그는 주변 눈치를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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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학로의 학전소극장이 15일 문을 닫는다. 운영난뿐 아니라 대표이자 가수인 김민기가 암 투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전소극장은 김민기가 1991년 설립해 33년간 운영한 공연장으로 한국 가요계의 중요한 성지였다.
학전소극장 폐관을 아쉬워하며 이곳을 거친 양희은·최백호·이은미·윤도현·설경구·이정은 등 가수와 배우가 공연 ‘학전 어게인’을 열기도 했다.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에게 김민기와 학전은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어제가 있어야 오늘이 있듯, 김민기가 없었다면 한국 가요의 기술적·사상적 수준은 몇보 후퇴했을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특히 김민기의 대표곡으로 1971년 양희은이 부른 ‘아침 이슬’은 진보 진영의 상징적인 노래가 됐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에 시련일지라.”
김민기는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한 후 ‘아침 이슬’을 만들었다. 1973년에는 정부로부터 고운 노래상도 받았다. 그런데 1975년 유신체제를 두고 찬반 국민투표를 하던 날 학생 시위대가 이 곡을 부르기로 한 것이 발각되면서 금지곡이 됐고, 김민기는 정보기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1970∼1980년대 내내 주류 가요계에서 활동하지 못했다.
한편 한국 1호 연예기자인 정홍택은 김민기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음악평론가 이백천이 어느 날 기타를 잘 치고 곡을 잘 만드는 뛰어난 학생이 있다며 데리고 왔는데 그가 바로 김민기였다. 그는 정홍택을 처음 만난 날 조심스럽게 “부탁할 것이 있다”면서 “맥주를 좀 사달라. 맥주가 너무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먹고 있다”고 했다. 김민기는 그저 맥주가 먹고 싶지만 주머니가 빈 순수한 청년이었는데, 격동의 역사가 오늘날의 그를 만든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결국 김민기는 1990년대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1991년 학전소극장을 세웠고, 1993년 음반을 발표했는데 이때도 그는 주변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학전소극장마저 문을 닫으니 많은 사람의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역사의 반은 위기에서 생겨났다는 아널드 토인비의 말처럼 오늘날 한국이 경제·문화 강국이 된 배경에는 1970∼1980년대 많은 한국인의 희생이 기반이 됐음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박성건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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