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누워있던 딸이 말했다… “이젠 자유롭고 싶어”
마돈나의 노래 ‘레이 오브 라이트(Ray of Light)’가 흐르면 발랄한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 ‘비’(이지혜·김주연)가 침대 위에서 천방지축 춤을 춘다.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24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비Bea’(믹 고든 작, 이준우 연출)의 무대 위엔 침대 하나와 정체 모를 반짝이는 물건이 가득 걸린 벽뿐. 신나는 음악이 멎을 때쯤 남자 간병인 ‘레이’(강기둥·김세환)가 찾아온다. 관객은 궁금하다. 세상 팔팔해 보이는 저 여자에겐 왜 간병인이 필요한 걸까. 무엇보다, 왜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걸까.
◇”엄마, 이젠 자유롭고 싶어”
‘비’가 ‘레이’에게 “엄마 ‘캐서린’(방은진·강명주)에게 줄 편지를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며 관객은 비밀을 알게 된다. “엄마, 난 죽고 싶어. 이 문제를 8년 동안 매일매일 생각해왔어. 난 나아지지 않아. 남자 친구도, 강아지도, 아기도 가질 수 없어. 이게 현실이야, 난 갇혔어. 엄마, 이젠 자유롭고 싶어. 그리고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뿐이야.”
비는 벌써 8년째 원인 모를 병으로 손가락 하나 제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다. 그가 무대 위에서 줄곧 보여준 것은 이미 굳어버린 몸이 아니라 생기발랄한 내면이었다. 자기 몸 안에 갇혀버린 이 아름다운 영혼에게 생존은 선택이 아니라 세상의 윤리적 기준에 의해 강요된 굴레다.
극이 시작되고 한참 뒤에야, 관객은 침대 위에 무력하게 엎드린 채 ‘레이’의 도움이 없인 미음 한 스푼도 넘길 수 없는 ‘비’를 본다. 벽에서 반짝이던 것들은 운좋게 컨디션이 좋은 날 비가 만든 282개의 귀걸이라는 것도. 연극은 결국 한계 지워진 각자의 ‘침대’ 아래로 뛰어내릴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생의 신산함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죽음은 공평하지 않다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목전에 둔 우리나라는 지난해 사망자가 35만명을 넘어섰다. 2040년엔 50만명, 2050년 70만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흔한 믿음과 달리 죽음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 10명 중 8명 이상이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데, 연명 의료 기술의 발달로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는 이들은 점점 늘어난다.
영화, 드라마, 연극 등 문화 콘텐츠 역시 점점 더 깊숙이 안락사 문제를 다뤄 왔다.<그래픽> 2022년 천만 감독 이준익의 첫 시리즈 연출작 ‘욘더’(티빙)는 배우 신하균과 한지민을 주연으로 안락사가 합법화되고 죽음 너머와 현실이 연결되는 근미래의 세상을 그렸다. 국내에서 2016·17·19년 세 차례 공연한 연극 ‘킬 미 나우’는 아내와 사별한 뒤 작가 경력을 포기하며 중증 장애 아들을 돌보던 아버지가 자신도 불치병에 걸리면서 맞닥뜨린 선택에 관한 이야기. 201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영화 ‘아무르’는 평생 사랑했던 아내가 갑작스러운 반신마비를 겪고 점점 상태가 악화되면서 남편이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결단의 먹먹한 과정을 담아냈다.
◇32만명, 존엄한 죽음 선택
존엄하게 죽음을 맞는 방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서울대의대 가정의학과 윤영호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21년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 76.3%가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 입법화’에 찬성했다. 2008년 조사에 비해 1.5배 이상 늘어난 숫자. 국립 연명 의료 관리기관에 따르면,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하는 연명 의료 중단 결정이 실제 실행된 사례 역시 제도 도입 첫해인 2018년 3만6275명에서 지난해엔 7만720명으로 늘었다. 벌써 6년간 누적 32만7097명이 무의미한 연명 의료 대신 존엄한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계를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특히 의사 조력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입법화되면 결국 나이 들고 쇠약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을 권리’가 ‘죽어야 할 의무’로 변질될 것으로 우려한다.(케이티 엥겔하트 ‘죽음의 격’, 은행나무, 2021)
“아픔이나 고통같은 거 말고 욕망을 느끼고 싶다”고 말하던, “실은 세상에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도 있다”고 말하던 연극 속 여자 ‘비’가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되는 순간, 무대 위엔 가장 신나는 한바탕 파티가 벌어진다. 잘 사는 것 만큼이나 잘 죽는 것도 중요해진 시대, 존엄한 죽음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지고 문화 콘텐츠가 이를 다루는 방식 역시 더 깊이있고 섬세해지고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