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은 언제 ‘진짜 글감’이 되는가

한겨레21 2024. 3. 1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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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의 글쓰기]‘드러난 글감’과 ‘숨겨진 글감’ 사이에서 새로운 생각을 담는 법
전남 여수의 돌산대교 북단 전망대에서 바라본 야경. 한겨레 자료사진

정작 글 쓰면서 제일 먼저 고민되는 것을 다루지 않았더군요. ‘글감 찾기’ 말입니다. ‘소재’라고도 하는 글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옷감’은 옷을 지을 때 쓰는 천이고, ‘땔감’은 불을 피울 때 쓰는 나무이니, ‘글감’은 글을 쓸 때 쓰는 재료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옷을 짓거나 불을 피우는 건 어느 정도 제한이 있습니다. 종이나 동물 가죽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실로 짠 천(섬유)이 옷감이겠죠. 땔감도 나무를 비롯해 마른 잎이나 종이, 기름, 석탄처럼 불에 타는 것으로 제한될 겁니다. 흙이나 돌멩이가 땔감이 되긴 어렵겠죠.

학생들에게 ‘내 생애 최고의 순간’ 물었더니

글감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흔히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글감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글감의 자격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이 세상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사물은 물론이거니와 경험과 기억, 상상, 이야기도 좋은 글감이 됩니다. 모든 게 글감이니 아무거나 집어서 쓰면 되겠네요(이 글은 ‘글감’이 글감이네요).

그런데도 왜 우리는 글감을 찾지 못해 허덕거릴까요? 경험이 적어 그럴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학교에서는 1학년 신입생 모두에게 성찰적 글쓰기를 가르칩니다. 글쓰기 과제 중 하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입니다. 이 주제의 글감으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한 게 뭐일지 예측되는지요? 한국 교육이 병들어 있음을 확인하는 증표이기도 한데요, 바로 ‘대학 합격’입니다. 컴퓨터 모니터에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본 순간이라는 겁니다. 사활을 건 전쟁터 같은 학교에서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인 거죠. 거기서 최고의 순간은 전쟁터(학교)에서 탈출해 대학에 골인하는 것입니다. 우정도, 사랑도, 여행도, 취미도, 작은 일탈도 아닙니다. 오직 대학에 가는 것이 유일한 최고의 순간입니다.

글감으로 삼을 만한 경험이 적으면 아무래도 글쓰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어느 정도 경험과 연륜이 쌓인 사람에게는 글감이 많습니다. 다만 무심히 지나쳤을 뿐이죠. 게다가 글을 쓰려 해도 글감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글감의 표면만 핥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감을 찾기 위해 글감을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보겠습니다. ‘드러난 글감’과 ‘숨겨진 글감’.

드러난 글감은 ‘표면적인 글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경험에서 가장 선명하고 공통적이며 공식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입니다. 이런 글감은 보통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여행을 예로 들어보죠. 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글감을 던져줍니다. 어디를 갔고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먹었는가 할 때, 그 각각의 장소와 볼거리, 음식이 다 글감 자격을 갖겠죠. 전남 여수에 갔다면 오동도의 동백꽃길, 돌산공원에서 보는 밤바다, 향일암에서 보는 일출이 있을 테고, 꼭 먹어봐야 하는 게장, 장어탕, 딸기모찌 같은 것들 말입니다. 여행에서 ‘꼭 가봐야 할 곳’ ‘꼭 먹어봐야 할 음식’ 같은 것이죠.

남들은 잊었지만 당신이 기억하는 것

숨겨진 글감은 ‘심층적인 글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드러난 글감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잘 보이는 깃발 같은 것이라면, 숨겨진 글감은 깃발과 깃발 사이에 있는 무엇입니다. 반짝이는 전구들 사이에 있는 흐릿하여 선명하지 않고 개별적이며 비공식적인 무엇입니다. 타인은 알 수 없고 예상도 못하는 것이라, 그저 ‘무엇’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숨겨진’ 무엇입니다. 능동의 ‘숨은’이 아니라, 피동의 ‘숨겨진’입니다. 글감이 스스로 숨은 게 아니라 우리 기억이 그것을 숨겨두었기 때문에 ‘숨겨진’ 겁니다.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애써 빛을 비추어 나오라고 하지 않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무엇이 숨겨진 글감일까요? ‘예외적인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잊힌 것, 중요하지 않은 것, 나머지, 잉여의 것, 별것 아닌 것. 그런 게 숨겨진 글감입니다. 제 경험을 말해보겠습니다.

2000년대 초 베트남 호찌민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학교 일로 베트남에 열흘 정도 머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맹장이 터졌죠. (어떻습니까. 이미 좋은 글감으로 보이죠?) 현지 병원은 시설도 열악하고 말도 안 통하니 절대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한인병원에 갔더니 체한 것 같다며 약 처방을 해주었습니다. 약 먹으면 가라앉겠지 했지만, 새벽에 죽은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쓰러져 꼼짝을 못했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프랑스 국적의 국제병원으로 이송돼 응급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새벽에 의사 세 명이 병원으로 달려와 ‘돈 워리, 돈 워리’ 하며 수술해주더군요. 사흘 뒤 퇴원했습니다. 수술비는 350만원.

제가 이 일을 글로 쓴다면 어떤 ‘글감’을 택했을까요? 맹장이 터졌을 때의 고통과 위급함? 베트남 의료체계의 문제점? 엄청나게 비싼 수술비? 저는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얘기를 쓸 겁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은 제가 누군가와 앉아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하면서 수다를 떨 때나 할 얘기입니다. “프랑스에서 지갑을 소매치기당했다고? 나는 베트남에서 맹장 수술을 한 사람이야!”라는 식 말입니다. 이럴 때는 목소리도 올라가고 ‘10분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는 식의 허풍도 섞어가면서 얘기했을 겁니다. 이런 게 드러난 글감입니다. ‘주요 사건 일지’ 같은 것이죠.

하지만 높은 봉우리 사이의 골짜기처럼 숨겨진 글감이 있습니다. 저를 돌봐주던 베트남인 남자 간호사입니다. 그는 저에게 한국에 가서 사는 게 꿈이고, 그 꿈을 이루려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이 어떤지 자주 물었습니다. 그에게 한국은 이상사회였습니다. ‘당신이 꿈꾸는 그런 한국은 없어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에겐 ‘그런 한국’이 있을지도 모르겠더군요.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하며 전자우편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주었습니다. 헤어지면서 어깨동무하고 한국에서 꼭 다시 만나자고 했던 그 친구에 대해 쓸 것 같습니다.

예외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환자와 간호사라는 정해진 관계가 아니라, 코리안드림을 가진 베트남 청년 간호사와 불평등한 한국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은 한국 선생의 짧은 만남이었으니까요. 깨끗하고 친절하며 첨단시설의 병원에서 일하면서도 조국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어하는 청년. 그 청년의 얼굴 위로 회사 중 역으로 보이는 옆 병상의 중년 남성에게 아침마다 다소곳이 신문을 갖다 바치는 여비서의 얼굴과 베트남 골목골목에서 만났던 베트남 민중의 고단한 삶이 겹쳐 보였습니다.

‘맛있는 연포탕’이 글감이 되려면

그렇다면 ‘숨겨진’ 글감은 글 쓰는 사람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제와 글감은 서로에게 기대고 있습니다. 글감이 따로 있고 주제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동시적입니다. 글감 안에 주제가 말하고, 주제 안에서 글감이 제 빛을 냅니다. 다음은 제가 쓴 글입니다. 읽어보시죠.

이틀을 앓았다. “싸게 타시랑게.” 극구 괜찮다고 하는데도, 장 보러 읍내 나가는 김에 원기회복을 하고 오자며 공양간 지킴이 두 분이 기력 없는 나를 차에 밀어 넣었다. 해남 읍내의 연포탕집은 소박하고 단정했다. 바지락 몇 알에 무와 배추로 우린 국물은 맑고 얌전했다. 파란 미나리는 날렵한 향기를 품고 있었고 낙지는 엄지손가락만 하게 살이 올랐다. 동상 걸린 살갗처럼 쉽게 터져 흰 살이 여리게 씹혔다.

둘째를 낳다가 양수색전증으로 죽은 누이 때문에 3년을 무기력하게 지냈다. 생활은 강바닥에 가라앉은 구두 같았다. 모든 게 부질없고 무의미했다. 그러다 이곳 낯선 절간으로 왔다. 묵언수행. 사연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연락할 데도 연락 올 데도 없다. 눈을 뜬 듯 감은 듯 망연히 앉아 망상을 밀어내기만 하면 된다.

며칠 지나니 아랫마을에서 대보름맞이 잔치를 크게 하는데 절집 식구들도 초대했다며 같이 가겠냐고 한다. 좌선에 지친 수행자들은 콧바람도 쐴 겸 남도 음식 맛도 볼 겸 옳다구나 하며 따라나선다. 나는 남겠다고 했다. 수행보다는 묵언이 간절했다. 절간처럼 조용해진 절간에 앉아 누이 생각만 하다가 감기가 들었다.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고 오한이 밀려왔다.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끓는 온돌방에 누워 땀을 쏟아도 이가 떨렸다.

이렇게 연포탕 앞에 앉아 한입, 탱탱하게 씹히는 낙지 다리를 씹는다. 입속에 들어온 낙지는 머릿속에 있던 누이를 밀어낸다. ‘지나간 거야. 너도 지나가고 있는 거고.’ 매 순간 생각은 생기고 머물다가 사라진다. 생은 오늘도 지나가되, 마음에 흔적과 기억으로 남는다. 퇴적층처럼 쌓인 흙더미를 뒤집을 수는 없다. 누이를 기억하는 나는 지나가고 연포탕을 맛있게 먹는 나로 살아간다. 나를 연포탕 앞에 앉힌 사람은 누이이기도 하고, 누이를 놓아주지 못한 나이기도 하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절집 식구들이기도 하다. 그 모든 거라고 생각하니 그제야 나란 존재는 그저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삶이 죽음이 인연이 헤어짐이 뭔지 아무리 가부좌를 틀고 찾아 헤매도 답을 찾을 수 없던데, 내 입에 앳되게 씹히는 연포탕이 나를 지금 현재로 데려왔다. 연포탕이 수행이다.

여행을 가서 연포탕을 먹었다면 그건 십중팔구 드러난 글감이 되기 쉽습니다. 맛있게 먹은 기억으로요. 단기 출가로 절에 갔는데 아픈 몸으로 먹은 연포탕은 숨겨진 글감일 수 있습니다. 같은 연포탕인데도 말입니다. 둘의 차이는 글감이 ‘나’와 맺은 관계에서 생깁니다. 여기서 ‘나’는 내 ‘생각’입니다. 나만의 생각입니다. 나만의 생각을 담는 재료일 때 그게 진짜 글감이 됩니다. 글 한 편에는 ‘작가가 이 세상에 내놓을 단 하나의 새로운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단 하나의 새로운 생각과 맞닿은 글감이 숨겨진 글감이고 심층적인 글감입니다.

낙지연포탕.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단 하나의 새로운 생각이 담긴 글

그렇다면 숨겨진 글감 찾기는 하나의 ‘내 생각’을 찾는 것과 같은 말이 되겠네요. 저는 매주 칼럼을 쓰면서 이게 잘되지 않아 고생합니다. 얼마 전에는 ‘눈’(目)을 글감으로 삼아 글을 썼습니다. 다른 언어에 비해 한국어는 ‘도끼눈, 실눈’처럼 ‘눈’을 다른 말에 비유한 단어가 꽤 많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죠. 그런데 써놓은 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비유적으로 쓰인 단어의 목록을 사전에 들어가서 다 찾다보니 그 무게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단어를 찾는 일은 ‘눈’이 들어간 표제어를 모두 뽑은 다음에 ‘함박눈’처럼 동음어를 지우고, ‘저울눈’이나 ‘씨눈’ 같은 말도 다 지우는 작업입니다. 십여 개 되는 목록을 손에 넣긴 했는데, 이걸 독자에게 어떻게 요리해서 내놓을지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 찾았는데, 이놈들을 어떻게 글에 녹여낼지 고민이었습니다. 이리 주물럭 저리 주물럭거려봤지만 뭔가가 빠져 있더군요.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나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거 같은데?’ ‘약간의 지식 전달 느낌?’

그래서 글을 뒤집어엎었습니다. ‘그래 내 눈이야. 동태를 닮은 내 눈. 동태눈!’ 제목을 ‘동태눈’이라 붙이고, 동태눈을 가진 사람은 마음도 탁한지 묻는 거로 바꾸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글이 ‘내 글’ 같아지더군요.

글감은 어디든 있지만 ‘글감 찾기’는 어렵습니다. ‘내 생각이 무엇이냐?’고 스스로 다그치고 윽박지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쉽게 찾은 글감, 표면에 드러난 글감 뒤에 웅크리고 있는 진짜 글감, 내 생각과 밀착된 글감을 찾아야 합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잘 찾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내놓을 단 하나의 새로운 생각을 담는 글감이 쉽게 찾아질 리 없습니다. 깃발과 깃발 사이, 불빛과 불빛 사이를 봐야 합니다. 곱씹고 거듭 곱씹어야 합니다. 유일한 삶을 살고, 유일한 이야기를 할 사람은 바로 나이므로, 곱씹을 가치가 있습니다.

[독자 글]

‘죽음’을 글로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열네 분이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어느 때보다 처연한 사연이 많아 읽어내려가기가 힘들더군요. 가슴이 저며지는 사연을 마음 한구석에 묻은 채 내색하지 않고 살아내기가 힘드셨겠습니다.

현지님의 할머니 얘기는 마음이 많이 아프더군요. 수진님은 아흔여섯 되신 할머니의 넉살 좋은 사투리를 들으며 새벽에 기저귀를 빤다는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미노님은 홀로 죽음을 맞이한 ‘그’의 흔적을 기억하는 글을 쓰셨고, 정선님은 갑작스럽게 돌연사한 큰오빠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았습니다. 은숙님은 고2 때 병상에서 죽어가는 아버지 모습을 힘겹게 바라보던 장면을 그렸고, 체스카님은 암투병을 하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형부의 모습을 마치 비늘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고 쓰셨습니다. 미수님은 아직 어린 다섯 살 때 할머니 시신을 모신 방에 들어가기 무서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함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혜욱님은 강의실에서 죽은 여인의 시신을 근접 촬영하듯이 자세하게 묘사하셨는데, 실은 자신이 죽는 악몽이었다는군요. 소진님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행복을 빌었습니다. 지은님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슬픔과 상처를 절절한 문장으로 그려냈습니다.

건영님은 출근길에 길냥이가 로드킬당하는 장면을 스냅 사진 찍듯이 포착해 묘사했습니다. 효상님은 돌보던 길냥이 ‘구찌’의 때 이른 죽음을 겪으면서 반려동물 치료제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담이님은 방에 들어온 돈벌레를 죽이고 휴지로 집었을 때 손에 전해지는 기분 나쁜 감촉에 초점을 맞추었더군요. 현우님은 수년 전 죽은 강아지 ‘몽이’ 이야기를 격한 감정을 담아 썼습니다.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가보겠습니다. 과제를 조금 늘려보겠습니다. 글을 쓰는 날 아침에 먹은 식사를 쓰는 건데요. 똑같은 장면을 쓰되, 분위기나 태도를 달리해 두 편을 써보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을 붙여주세요. 제목은 같아도 되고 달라도 됩니다.

주제: 나의 오늘 아침 식사

유의 사항: 같은 장면을 다른 분위기로 두 편을 쓰되, 제목을 붙여주세요.

분량: 각각 1천 자 정도(띄어쓰기 포함)

마감: 2024년 3월31일

보낼 곳: han21@ hani.co.kr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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