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페미야?’ 질문에 ‘넌 아니야?’ 당당히 되물을 수 있길”
2016년 강남역 살인 계기
활발해진 페미니스트 선언
백래시·내부 균열 등 영향
공격·비난 대상으로 전락
“최근 3~4년간은 침체기
그래도 연대하며 나아가야”
대학생 이정은씨(22)는 2019년 2월 머리카락을 처음 짧게 잘랐다. 고등학교 2학년 개학을 앞둔 때였다. 거울을 보며 느꼈던 ‘묘한 기분’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게 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긴 머리에 가려진 내가 아니라 진짜 나를 마주한 느낌.” 이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스쿨미투’ 사건을 접하고 페미니즘을 알게 됐다. 그는 “‘탈코르셋’을 표현한 웹툰을 본 것이 머리를 자르는 직접적 계기였다”고 했다.
5년이 지난 지금 이씨는 전보다 많이 움츠러든다고 했다. 대학에서 페미니즘 소모임을 운영하는 그는 지난해 11월 ‘혐오범죄에 맞서’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며 계속 주변을 살폈다.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20대 남성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성의 쇼트커트(짧은 머리) 스타일을 문제 삼으며 무차별 폭행했던 사건(11월4일)이 벌어진 때였다. 어렵게 붙인 대자보가 무더기로 쓰레기통에서 나왔다. 모르는 번호로 ‘협박 문자’가 왔다.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것을 조심하게 됐다”고 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계기가 된 ‘페미니즘 리부트(reboot·재시동)’를 기점으로 많은 여성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선언했다. 어떤 이는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 했고, 어떤 이는 전업 활동가로 뛰어들었다. 광장으로 나와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이들의 그 이후는 어떤 모습일까. 경향신문은 지난 8일 불꽃페미액션이 실시한 ‘페미니스트 안부조사’ 설문(126명 대상)에 참여한 8명을 인터뷰했다.
초등교사 임모씨(36)는 2018년 3월5일을 잊지 못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가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날이다. “생중계 방송을 보면서 엉엉 울었어요. 너무 걱정되는 거예요. 저분은 어떡하나, 새 직장을 구해야 할 텐데, 취업은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끊이질 않았어요. 저랑 동료 교사들도 교장·교감에게 끊임없이 성희롱을 당했거든요.” 임씨는 이후 여성단체에 가입했다. 교무실 책상에는 페미니즘 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책상을 거쳐간 책은 1000권이 넘는다.
임씨는 이제 페미니스트인 것을 “숨기듯 산다”고 했다. “제일 막막할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어린아이마저도 ‘선생님, 페미예요?’라고 물을 때예요. 성평등 교육을 하려고 하면 아이들마저도 사상검증을 하려 하는 거죠. 너 페미야?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냥 얼버무려요. 질문을 가장한 공격이니까요.”
불꽃페미액션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임씨처럼 느끼는 이들이 많다. 단체 가입·후원이나 온라인 참여 등 페미니즘 활동 경험이 있다고 답한 101명 중 43명(42.6%, 복수 응답)이 “활동을 향한 지지나 공감보다 비난이나 조롱이 많을 때”를 힘든 순간으로 꼽았다. “활동을 그만뒀다”고 답한 사람은 39명(38.6%)이다.
응답자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62명, 49.2%), 2018년 전후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운동(20명, 15.9%), 학교·직장 내 성폭력 사건(13명, 10.3%) 등이다. 젠더 폭력 사건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여성들은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헤어지자 말했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길에 있었다는 이유로 폭행당하거나 살해됐다. 서울 금천구 교제 살인 사건, 서울 관악구 ‘등산로 성폭행 살인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폭력은 실재하는 위험으로 여성들의 삶을 위협한다. 취업준비생 김혜빈씨(28)는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하면서도 자기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게 무섭다. 생계와 일상의 안전을 위협받는 상황이 더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전업 활동가도 협박과 폭력에 시달린다.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지선씨(34)는 “소리를 지르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악성 전화’를 종종 받는다”고 말했다. 퇴사를 앞둔 그는 “지쳐서 퇴사하는 것이라서 (퇴사)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고 했다. 불법촬영·성착취물 근절 활동 단체에서 일했다는 이세희씨(32)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성이 사무실 문을 따고 들어와 위협적으로 쳐다보고 지나간 적도 있다”고 했다.
정부는 올해 예산안에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여성가족부는 폐지 수순에 들어갔다. 특정 게임 이용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페미니즘 표현을 문제 삼고 마녀사냥을 벌였으나 회사는 이에 동조하고 방관했다.
기자들이 만난 이들은 2015년 전후를 페미니즘 ‘활황기’, 최근 3~4년간을 ‘침체기’로 여겼다. 이 침체에 관한 류민희씨(48) 심정은 복잡하다. 사회운동단체 상근활동가인 그는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 심리 및 행동)도 백래시지만, 페미니즘 안에서 균열이 발생한 영향도 있다”고 말한다. “2020년 트랜스젠더의 숙명여대 입학 포기, 2021년 변희수 하사 사망 사건이 기억나요.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소수자를 욕하는 댓글이 정말 많았거든요. 그건 페미니즘으로 볼 수 없다고,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얘기하지 못하면서 떠난 사람들도 생긴 것 아닐까요.”
이들은 “페미니즘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장아진씨(29)는 “백래시가 있다는 건 역설적으로 존재감의 증거”라며 “견제할 필요도 없는 존재였다면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여가부 폐지’를 들고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씨는 “‘너 페미야?’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다들 ‘그럼 넌 아니야?’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지선씨는 “우리는 ‘계약직 페미’가 아니다.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아기 고양이를 돌보듯 스스로 잘 보살피면서 나아가자”라고 했다.
김혜빈씨도 연결·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말했다. “(지금 다들) 백래시의 강을 건너고 있는데, 다들 잘 사는지 궁금해요. 잘 버티는지도요. 예전엔 집회·시위에서 자주 만난 그분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안부를 묻고 싶어요.”
강은·이예슬·전지현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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