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2000명일 필요도, 0명일 근거도 없다
전공의들의 병원 이탈이 20일째에 접어들고, 의대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장기화할수록 의아한 점이 있다. ‘정부는 왜 이토록 급하게 매년 2000명씩 늘리겠다’는 것인지 ‘의사단체는 왜 한 명의 증원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인지 양측 입장 모두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와 의사단체는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중증환자들의 호소와 남아 있는 의료진의 희생,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국민 전체의 피로감까지 생각하면 양쪽이 물러서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지켜보는 사람은 알 길이 없다.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 정부가 사태 장기화를 감수하고 2000명 증원을 밀어붙이는 데에는 우호적 여론이 힘이 됐을 것이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 당시 의대 정원을 10% 줄인 이후, 2020년 400명 증원을 시도했다 의사들의 반발에 무산됐던 점도 정부에는 또다시 빈손으로 돌아서는 경험을 남기고 싶지 않은 계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내세운 ‘매년 2000명씩 5년간 1만명 증원’이라는 규모와 속도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인가 하는 것은 다른 판단의 문제다. 정부는 ‘의사 수에 해당하는 양과 의료 교육의 질’을 모두 충족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말한다.
정부는 한국개발연구원(KDI)·한국보건사회연구원·서울대 등의 연구가 공통적으로 2035년을 기점으로 1만명의 의사가 부족하다고 전망하고 있으며, 2000명은 “정부의 정책 결정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교육의 질은 “현재도 충분하고, 보완도 가능하고, 정부도 적극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뒤집어보면 “정부의 정책 결정”이므로 얼마든지 조율 가능하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정부가 인용한 보고서의 연구자들조차 연간 500~1000명 규모의 “점진적 증원”을 얘기하고 있다. 의사가 부족한 지역·필수의료에 의사가 더 배분될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의사 수를 늘리는 속도는 완급 조절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2000명 증원을 관철시키면 당장 정부의 성과로 남겠지만, 교육현장에서 나타날 문제는 시차를 두고 부작용을 키울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정부의 행보에서 우려스러운 점은 땜질식 정책 결정을 통해 사회적 갈등 고리를 연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데 이어, 3401명을 늘려달라는 대학 측의 증원 신청 결과를 발표한 뒤 대학 본부와 의대 구성원 사이의 갈등도 심상치 않게 번지고 있다. 동시에 간호사에게 합법적으로 의사 업무 일부를 할 수 있도록 하면서, 간호법 제정을 놓고 힘겨루기를 벌였던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대립 구도마저 재부각될 조짐이 보인다.
정부의 강경기조도 그렇지만, 의료현장을 떠난 채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고 외치는 의사들의 주장도 동의를 얻기 어렵다.
의료계는 필수·지역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것은 의사 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낮은 수가,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 근무여건 악화 등 열악한 환경과 정부의 정책 부재 때문이라고 본다. 필수·지역의료를 선택하는 의사가 늘어나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물론 정부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사를 늘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필수·지역의료 공백을 현재 심각한 수준으로 방기한 책임에서 의사들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번에 3401명을 더 뽑겠다는 대학들의 증원 신청 중 72%가 비수도권 지역 대학에서 나왔다. 지역 내에서의 의사 양성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볼모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되기 어렵다. 정부와 의사들이 기싸움을 벌이는 동안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환자들은 피가 마른다. 토론회에서 드러난 일부 의사들의 과도한 엘리트·선민의식, 병원에 남은 전공의의 개인정보를 색출하고 조롱하는 의사집단 내부의 심각한 폐쇄성은 집단 이기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번만은 의사들의 기를 꺾어보겠다는 정부, 정부는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란 의사들의 싸움이 길어질수록 정부와 의료계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도 냉소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의·정 대화가 필요하다는 각계의 요구를 외면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 ‘2000 대 0’이라는 극단적 주장을 내려놓은 양측의 대화를 기대한다.
이윤주 정책사회부장 run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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