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신부가 붓으로 쓴 예수의 가르침…"잘 쓰려면 마음 비워야"
"야구나 골프하는 사람들은 (공이) 잘 맞으면 손에 짜릿함이 온다고 하잖아요. 붓글씨도 사실 그런 게 좀 있어요. 획(劃)이 나 자신을 뛰어넘어서 나올 때가 있거든요." (정성훈 신부)
신부 다섯 명이 서울 명동대성당 지하 전시장인 '갤러리 1898'에서 '십자가 영성'을 주제로 13일부터 합동 서예 전시회를 연다.
한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비슷한 시기에 신학교를 다니며 동기생처럼 우애를 나눈 사이다. 도 신부와 정 신부는 중국 베이징에 파견돼 있던 시기에 이동천 선생을 만나 평소 관심 있던 서예의 세계에 더 깊이 다가갔다. 박 신부는 시차를 두고 파견돼 현재 베이징에 머물고 있다. 의정부와 베이징이라는 공간, 서예와 신앙, 이동천이라는 스승을 매개로 5명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용 신부와 정 신부를 전화로 만나 서예 및 이번 전시회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성직자에게 먹과 붓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용 신부는 이동천 박사의 가르침처럼 서예가 글자의 형체를 그리는 것을 넘어 영혼을 새기는 일이라는 지론을 폈다.
글을 쓰고 나서 체중이 감소한 것에 대해 "한 자 한 자, 육체적인 근력뿐만 아니라 마음을 담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용 신부는 "체력 소모는 심하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그런지 (머리가) 아주 맑아지고 어떤 때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붓글씨에) 몰입했다가 풀리는 순간에는 운동한 다음에 마무리 운동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다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소개했다.
서예가 예삿일이 아닌 것은 정 신부도 마찬가지다. 십자가와 심장을 형상화한 모양을 그리다가 붓이 부러진 적이 있다. 그는 "획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붓이 주는 무게감을 표현했다.
다만 붓글씨를 쓰면 치유라는 특별한 체험도 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신부는 고해성사 과정에서 인간의 죄를 반복해 접한다. 또 어렵고 힘든 사람들,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인간인 신부에게 이런 활동의 반복이 고될 수밖에 없다.
정 신부는 신부가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불리기도 한다며 "(사제들은) 사람들의 상처를 보면서 상처받는다"고 설명했다.
이런 그에게 서예는 잡념을 내려놓는 과정이고,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이며, 마음을 수련하는 일이다.
정 신부는 "마음이 좋지 않을 때 쓴 글씨와 기분이 상승했을 때, 혹은 우리끼리쓰는 표현으로 정신을 놓았을 때 쓴 글씨가 다르다"며 잘 쓰려면 "결국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 내놓는 작품은 모두 35점이다. 다섯 신부 모두 1인당 7점으로 숫자는 같다. 하지만 서폭(書幅)에 담은 문구, 글자체, 먹물의 농담(濃淡)은 '5인 5색'이다.
정 신부는 '十字聖號'(십자성호), '溫柔謙遜'(온유겸손) 등을 썼다. 한 신부는 이번 전시회의 주제가 된 '십자가 영성' 외에 '고통의 신비', '주님의 종' 등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먹으로 표현했다.
남 신부의 작품 중에서는 요한복음 19장 28절에 나오는 "목마르다"에 착안해 쓴 '我渴'(아갈)이 눈길을 끈다. 붓이 종이를 할퀴며 지나간 것과 같은 흔적으로 예수의 목마름과 고통을 표현했다.
도 신부는 한글로 '무릇 사람의 선악은 품은 뜻에 달려 있다'고 쓴 작품과 같은내용을 한자로 표현한 '凡人善惡係於所志'(범인선악계어소지) 등을 준비했다.
용 신부는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 중 가장 애착을 느끼는 한 점으로 '용서'를 꼽았다. '용서'라고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덧붙였다.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누군가의 흠집이나 잘못을 공격하고 나무라기만 하지용서하려는 마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서 특별히 '용서'에 신경을 많이 써서 작업했습니다." 정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참회와 희생, 극기, 회개, 기도로써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기간인 '사순'(四旬)에 전시회를 열게 된 것에 주목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주님 부활 대축일'(올해는 3월 31일) 전 40일간을 사순으로 규정한다.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시기입니다. (전시장에 오신 분들이) 글귀를보면서 좀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신부들에게 붓글씨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또 다른 통로가 될 전망이다.
용 신부는 "내 글씨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정말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그런글씨를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좀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전시는 22일까지 이어진다. 신부들은 작품을 담은 상품(굿즈)을 판매해 난민들을 돕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에 수익금 전액을 기부할 계획이다
송동근 기자 sd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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