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세상]안창호와 선우일선

기자 2024. 3. 10.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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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은 1938년 3월10일 오랜 투옥과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작고했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였다. 선생은 청년시절부터 시가(詩歌)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창가(唱歌)가 공동체의 화합과 단결, 민족 정서를 고양하는 데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18세 때 밀러 목사가 운영하던 밀러학당에서 써낸 ‘무궁화 노래’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노랫말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작사가가 친일파 윤치호냐, 안창호 선생이냐는 논란이 끝이 없다. 안창호 선생과 함께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평양 기생 출신의 가수 선우일선(사진)이다. 그의 대표곡은 ‘조선팔경가’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석굴암 아침 경은 못 보면 한이 되고/ 해운대 저녁달은 볼수록 유정해라…/ (후렴)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1936년경 이 노래가 크게 유행하면서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그 무렵 선우일선이 남몰래 안창호 선생을 도운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상하이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된 선생은 병원 근처에 방을 얻어 투병 중이었다. 선우일선은 일경의 눈을 피해 선생을 찾아와 치료비 50원을 내놓았다. 선생이 거절하자 선우일선이 울면서 매달리는 통에 고맙다며 5원을 받았다. 선우일선은 선생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안창호 선생은 끝내 작고했고, 선우일선은 한국전쟁 때 북쪽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선우일선은 평양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다 1990년 작고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을 돕던 여가수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삼월이다.

오광수 시인·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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