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연극 이끈 목포 토박이…'이해랑연극상' 연출가 김창일 별세

이태훈 기자 2024. 3. 10. 18:2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국연극제 희곡상 5회 수상 기록
호남 연극 한 단계 끌어올린 주역
제28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김창일을 목포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만났다. 그는“연출가 손진책이나 기획자 박명성 같은 이들이 목포 와서 공연한 뒤 연극하는 데 보태라며 돈을 주고 가곤 했다. 내가 연극으로 이룬 게 있다면 다 그런 분들의 도움 덕”이라고 했다.

2018년 제28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연극 연출가 김창일(77)씨가 10일 오전 4시55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목포시립극단 창단 상임 연출을 지내며 호남 연극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역. 전국연극제 희곡상을 5번이나 받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곳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희곡을 썼다. ‘갯바람’, ‘도시 탈출’, ‘안개 섬’, ‘붉은 노을 속에 허수아비로 남아’ 등 그가 쓰고 처음 무대에 올렸던 연극들은 여전히 전국 각지의 극단들이 즐겨 공연하는 레퍼토리가 됐다.

“연기부터 극작, 연출, 미술, 조명, 무대까지 다 했으니 ‘잡것’ 아니겠소. 극장 하나 없던 고향서 꾸역꾸역 해왔으니 어디서 툭 튀어나왔는지 모를 ‘똘것’이기도 하고.” 2018년 4월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본지 인터뷰에서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흔히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라고 하는데 그의 삶이 정말 그랬다.

김창일은 목포 앞바다 섬을 배 타고 돌며 물건을 팔던 선창가 잡화상 집의 6남매 중 장남이었다. 늘 연극을 하고 싶었는데, 공대 가겠다며 대입 시험 보러 서울 갔다가 서라벌예대에 지원해 덜컥 붙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집에 가니 학교명 찍힌 등록금 고지서가 와 있었다. 가족은 그때서야 그가 대학에서 연극을 배운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울로 되돌아갈 때에야 아버지는 ‘한번 해보라’고 허락했다.

졸업 뒤 1년쯤 연극판에 있었지만 아버지 병환으로 집에 내려가 가족을 건사해야 했다. 그는 “이불 한 채 지고 완행열차를 탔는데 목포 닿을 때까지 밤새 울음을 삼켰다”고 했다.

집안일 돌보며 틈틈이 대학생들을 모아 연습도 시키고 공연도 했다. 목포에 제대로 된 극장 한 곳 없던 시절이다. 배우 김길호 선생과 예식장을 빌려서 형광등 켰다 껐다 하며 연극을 올렸다. 선창서 나무 주워다 무대 만들고, 분유 깡통으로 조명기를 만들었다. “추송웅 선생이 ‘빠알간 피터의 고백’ 공연하러 오셨을 때도 그 조명기를 썼어요. 왜 그리 부끄럽던지….”

23일 서울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제28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극작연출가 김창일씨와 특별상 수상단체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아시테지) 한국본부 김숙희 이사장이 심사위원들과 함께했다. 왼쪽부터 배우 손숙, 김숙희 이사장, 김창일씨,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 이미원 한예종 교수.

마흔 살 되던 1987년, 그의 연극 인생이 비로소 제대로 시작됐다. “결혼 때 아내에게 ‘마흔 살까지는 연극 안 한다’고 약속했거든요. 근데 마흔이 딱 되니까 장사가 자리를 잡아서 내가 없어도 되겠더라고. 게다가 전국연극제 지역 대회 우승하면 지원금을 준다네. 돈 받고 연극하는 꿈이 생긴 거지.” 그해 희곡 ‘갯바람’으로 처음 참가한 전국연극제에서 희곡상과 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이어서 ‘도시 탈출’, ‘안개 섬’까지 3년 연속 전국연극제 희곡상을 받았다. “장사하며 섬마을 돌 때 보고 들었던 이야기가 창작의 자양분”이었다.

1994년에는 ‘붉은 노을 속에 허수아비로 남아’로 전국연극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호남 연극계 전체의 경사였다. 목포시립극단이 만들어졌고, 그는 상임 연출이 됐다. 2011년 희곡상을 받은 ‘막차 타고 노을 보다’는 뇌졸중으로 입원했던 경험담에서 나온 이야기다. “약 맞고 자꾸 잠이 들어서 가족 면회 시간을 두 번 놓친 거야. 그냥 가면 끝내 못 보는 건데, 사는 게 참 얼마나 허무해요? 퇴원 뒤 그 얘기를 썼지요.”

이후 그는 ‘매천야록’의 구한말 우국 학자 황현(黃玹) 선생 이야기 등 지역 인물 3부작도 썼다.

제28회 이해랑연극상 심사위원회(위원장 임영웅)는 “김창일의 연극은 남도 섬사람들의 진솔한 삶에 주목하고, 산업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듬으며 창작과 연출 양면에서 일관되게 수준 높은 전통 리얼리즘의 연극 기조를 보여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어 “김우진·이화삼·차범석 등으로 이어진 목포와 호남 연극의 맥을 계승해 광주·여수·광양 등에서 수준 높은 연출로 지역 연극 발전에 진력해온 것 또한 일찍이 이동극장 운동을 펼쳤던 이해랑 연극 정신에 부합한다”고 했다.

생전의 그는 “실은 작가도 연출가도 멀었다. 돌아보면 조촐한 연극 인생이었다”고 했었다. 겸양의 말과 달리, 그가 한국 연극에 남긴 족적은 깊고 선명하다.

유족으로 부인 윤장숙씨, 아들 수홍 금호타이어 책임연구원, 형수 현대오토에버 책임, 며느리 김보영 이혜령씨. 목포장례식장 202호, 발인 12일 10시. (061)242-4400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