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로 문학박사 딴 77세 中企 사장님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3. 1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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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철 동원특수화학 대표(77)는 '업력 50년' 외길의 장인이다.

1977년 만 30세의 나이에 직원 3명으로 출발한 고무제품 회사는 곧 50주년을 맞는다.

그는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직원 3명으로 시작한 작은 고무회사를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도 흔들리기는커녕 흑자를 낼 만큼 탄탄하게 키웠다.

오늘날 한국인이 타는 자동차 중에 황 대표 회사 제품이 내장되지 않은 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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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특수화학 50년경영 황재철 대표, 한양대 최고령 박사
차량용 누전방지 터치 키패드
현대차 등 국내시장 80% 점유
직원 3명 출발해 곧 50주년
"평생 제조공장 운영하며 얻은
몸뚱어리의 때 상관없지만
정신의 때는 남겨선 안돼"
'윤동주 시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로 77세의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은 황재철 동원특수화학 대표. 한양대

황재철 동원특수화학 대표(77)는 '업력 50년' 외길의 장인이다. 1977년 만 30세의 나이에 직원 3명으로 출발한 고무제품 회사는 곧 50주년을 맞는다.

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그는 지난 2월 한양대 교정에서 박사 학위 졸업 가운을 입었다. 논문 제목은 '윤동주 시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다. 황 대표는 이로써 한양대 역사상 최고령 박사 학위 수여자가 됐다. 황 대표를 최근 한양대에서 만났다.

"일흔 넘은 나이에 책가방 메고 학교에 간 이유요? '삼불후(三不朽)'란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황 대표와 윤동주 시인의 인연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직원 3명으로 시작한 작은 고무회사를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도 흔들리기는커녕 흑자를 낼 만큼 탄탄하게 키웠다. 한양대·고려대·서울대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줬다. 그러던 중 황 대표는 중국의 한 고전에서 '삼불후'란 단어를 접했다.

"'삼불후'란 '썩지 않는 세 가지'란 뜻이에요. 여기서 세 가지는 '공(功), 덕(德), 말(言)'인데, 해석하면 '업적을 남기고, 인격을 남기고, 글을 남기라'는 의미입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후일에도 썩지 않을(不朽) 글을 아직 남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게 잡아도 아들뻘, 옛날로 치면 손자뻘인 20대 대학원생들과 똑같은 강의를 들었다. 그의 사전에 '결강'은 없었다. 회사를 꾸리면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으며, 매주 숙제로 주어지는 발표 역시 아무리 회사 일이 바빠도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윤동주의 시적 요람인 '북간도, 평양, 서울, 교토, 후쿠오카'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사라질 뻔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자신만의 풍화작용을 견뎌낸 작품들입니다. 윤동주 시의 생명력이 아직도 견고한 건 그런 이유일 거예요."

"평생 공장을 운영하면서 깨달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몸뚱어리의 때는 묻어도 되고 낡은 옷도 상관없지만 정신의 때는 절대 남겨선 안 된다'는 겁니다. 살아보면 압니다. 정말로 소중히 가꿔야 할 건 몸이 아니라 정신의 때예요. 정신의 때는 자기 스스로 못 씻으니 스승을 만나야 하고요."

오늘날 한국인이 타는 자동차 중에 황 대표 회사 제품이 내장되지 않은 차는 없다. 자동차 실내에서 스위치를 누르면 전류와 연결이 되는데, 이 전류를 흐르게 할 때 누전이 되지 않는 터치 키패드가 사용된다.

황 대표의 회사는 바로 이 키패드의 제작사다. 현대차·기아 등에 납품되는 이 회사 제품의 국내 점유율은 80%에 육박한다. 한때는 경쟁사가 없어 완전 독점이었다.

특히 황 대표는 은행 대출을 1원도 받지 않는다는 '무차입 경영'을 정도(正道)로 믿으며 살아왔고, 그 때문에 IMF 위기도 무사히 지났으며 매출은 연 200억원 수준이다.

50년 가까운 업력을 이어오다 보유했던 회사 2개는 매각했다. "더 물욕을 부리지 말자"는 생각에서였다. 대신 큰 액수는 아니어도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도서 구입비를 주면서 살아가 마음의 부자가 됐다. 그의 집무실 책상 뒤에는 A4 용지로 뽑은 고아원·어린이재단 후원 목록이 붙어 있다.

인터뷰 직후 '1947년생 백발의 학생'은 번쩍거리는 검은 세단은커녕 한껏 젊은 걸음으로 교정을 뚜벅뚜벅 가로질렀다. "학교에 올 땐 학생이니, 지하철과 버스를 타야죠."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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