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콩나물시루에서 탈출했네”...한강도 뚫고 외환위기도 뚫어 6년반만에 탄생한 ’이것‘ (4)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4. 3. 1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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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은 ‘콩나물 시루’
1991년 1월 지난 밤 내린 눈으로 도로가 빙판으로 변하면서 지하철로 몰린 시민들로 승강장이 붐비고 있다. [매경DB]
1980년대 중반 출퇴근 시간대 서울지하철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였습니다. 네 개 호선이 숨 가쁘게 달렸지만, 이로써는 피크타임 승객 수송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서울로 인구집중이 가속화되고 있었고, 동시에 목동, 개포 등 외곽의 택지개발 붐이 일어남에 따라 도시반경이 지속적으로 넓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은 서울 전체 통행량 가운데 16~20%만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1기 지하철 건설만으로는 도시철도 네트워크가 여전히 부족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 어느 누구도 지하철의 추가건설을 입에 올릴 수 없었습니다. 이미 1기 지하철은 2조 원이 넘는 막대한 부채 위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1987년부터 시작된 제6차 경제개발 시기에도 도시철도에 투입된 정부 예산은 768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정부조차도 신규 지하철 노선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었습니다. 민정당은 선거 때마다 지하철 건설을 공약했지만, 정작 서울시 재정지원에 대한 방안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1992년 1월 서울 신촌에서 바르게살기운동 서울시협의회가 ‘일주일에 하루 자가용 안타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날 캠페인은 에너지 10%를 절약하기 위해 전국 15개 시·도에서 열렸다. [매경DB]
‘마이 카’ 시대가 열린 1980년대 후반부터 자가용이 대중적으로 보급되었고, 이는 곧 서울 뿐 아니라 수도권 위성도시까지 엄청난 교통체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계속되는 교통대란 앞에 정부와 시 모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교통수요를 분산하고 대기오염을 해소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시정 과제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서울시는 부랴부랴 해산한 지하철 건설본부 관계자들을 다시 불러 모아 서울시 지하철건설기획단을 발족합니다.

1988년 1월 서울시는 ‘지하철 5개 노선 추가건설 계획’을 내어 놓습니다. 3·4호선 개통 이후 처음으로 공식 발표된 지하철 계획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막대한 건설비는 어떻게 마련할 생각이었을까요. 서울시는 일단 정책을 발표하되 구체적인 재정마련을 생각해 두지 않았고, 전부 정부예산에 기댈 생각이었습니다.

1988년 한 일간지에 실린 서울시 지하철 신설계획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시가 발표한 계획은 지하철 5·6·7호선의 신설과 3·4호선의 연장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5호선은 영등포~김포공항(13km), 6호선은 왕십리~군자~천호(11km), 7호선은 잠실~둔촌~고덕(9km) 노선이었고 3호선 양재~수서~성남(16km), 4호선 사당~과천~금정(16km) 구간을 추가로 개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계획은 대체적으로 지하철을 새로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네트워크를 연장하거나 지선을 추가하는 것에 치중해 있었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지하철 사각지대에 지하철을 놓을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당시의 빈약한 재정상황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정부도 이에 발맞추어 1989년 1월 지하철 6개 노선 86.7km를 신설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무려 지하철 13호선까지의 건설안이 담겼으나, 이 역시 재정적인 뒷받침 없이 마련된 계획이었습니다. 이처럼 시와 정부 모두 지하철의 추가건설에 대한 필요성은 절실하게 인정하지만 예산 조달이 막막하여 계획만 장황하게 늘어놓는 상황이었습니다. 현실적인 대안은 없고 계획만 만들어지는 지지부진한 상황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신설 지하철은 도심을 관통해야 한다’… 국토개발연구원의 제언
1989년 서울시에서 발표한 서울 지하철노선 확정조사 최종보고서. 2기 지하철 노선(5·6·7·8호선)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인터넷 캡쳐]
본격적으로 2기 지하철 건설의 시동이 걸린 것은 1989년 서울시가 국토개발연구원에 지하철 건설용역을 주면서 부터였습니다. 용역 결과는 그해 연말 보고서로 제출되었는데, 여기에는 2·3·4호선의 연장과 5~9호선의 신설이 담겨 있었습니다. 국토개발연구원은 앞서 서울시가 구상한 지하철 계획의 신설·연장노선 모두 도심이나 업무지구를 관통하지 않아 교통난 분산에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연구원은 시에 목표치인 지하철 교통수송 분담률 50%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서울시내 곳곳에 더 많은 간선망이 필요하고, 이 노선은 되도록 도심을 지나야한다고 제언합니다. 이 기조 아래 노선도는 전면 수정되었습니다.

기존 3·4호선의 연장은 입주가 진행되었으나 지하철이 없어 교통난을 겪고 있던 개포지구와 상계지구에 지하철을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호선은 서울의 동서를 잇는 노선으로, 6·7호선은 도심을 관통하는 간선망으로 기획되었습니다. 8호선의 경우 서울 동남부와 광주대단지를 연결하는 목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2기 지하철은 두 단계로 나뉘어 착공되고 개통되었습니다. 1단계로 추진된 구간은 2·3·4호선의 지선과 연장노선을 비롯해 5호선 전 구간, 7호선 강북구간(장암~건대입구), 8호선 성남구간(잠실~모란)이었습니다. 1990년 6월 5호선의 착공을 시작으로 그해 연말까지 7·8호선이 삽을 떠 공사에 돌입했습니다.

외환위기가 멈춰세운 2기 지하철 공사장
1990년 6월 서울시청에 서울 지하철 5호선 착공을 기념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매경DB]
지난 화에서 1970년 일본조사단이 제안한 서울 지하철 노선이 5개 노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제시된 5호선은 천호동에서 시작해 답십리, 종로, 서대문을 거쳐 연희동에 닿는 노선이었습니다. 한편 2기 지하철 계획에서 거론된 5호선은 서울 서쪽 노선이 앞선 계획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습니다. 상일동에서 시작해 천호와 왕십리, 광화문, 서대문을 지나는 것까지는 비슷했지만, 연희동이 아닌 여의도로 틀어 영등포를 지나 김포공항이 종점이 되었습니다. 1970년 계획의 2호선 서부구간과 5호선 동부구간을 연결해 새로운 5호선 노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994년 11월 서울 지하철 5호선 중 최대 난공사인 여의도~마포구간 하저터널이 관통된 가운데 공사 관계자들이 이를 기념하고 있다. [매경DB]
5호선은 지하철로부터 소외되었던 강동·강서구간의 착공이 우선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5호선은 각각의 구간에서 한 번씩 총 두 번 한강을 지나게 됩니다. 1기 지하철에서 한강 도하가 모두 교량을 통해 이루어진 것과 다르게 5호선에서는 최초로 하저터널 시공이 진행되었습니다. 한강 아래 터널을 뚫는 것은 상당한 난공사였습니다. 광나루-천호 구간의 경우 한강의 물을 막은 다음 땅을 파내려가 터널을 설치했고, 여의나루-마포 구간은 강 중앙에 인공 섬을 만들고 그곳에서 수직으로 내려가 양방향으로 터널을 연결했습니다.

5호선은 1993년까지 1단계 구간 개통이 목표였지만, 각종 사건사고와 자금조달의 어려움, 난공사 등의 이유로 연기되었습니다. 강동구간은 예정일로부터 2년 뒤인 1995년 11월 운행을 시작하였고, 강서구간과 도심구간은 일 년 더 늦어져 1996년에서야 전 구간이 개통되었습니다. 1996년 10월 7호선 강북구간과 11월 8호선 성남구간도 연이어 개통하며 2기 지하철 1단계 공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 한남동 이대체육장에서 열린 제2기 지하철 2단계 구간(6·7·8호선) 총61.5km 착공식에 참석해 시삽을 하고 있다. [매경DB]
1997년 4월 서울 마포구 공덕동로터리 지하철 6호선 공사현장에서 굴착 작업 중 가스관이 손상되어 폭발 사고가 있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이 사고로 지하에 매설된 통신회선과 광케이블이 불에 타 신수동, 노고산동, 염리동 등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전화가 불통이 되어 큰 혼란을 빚었다. [서울역사편찬원]
한편 2기 지하철 2단계 공사는 1992년부터 1995년 사이 순차적으로 착공에 돌입했습니다. 2단계 공사는 6호선 전 구간과 5호선 시내구간, 7호선 강남구간(건대입구~온수), 8호선 암사구간(암사~잠실)이 해당했습니다. 그중 6호선은 북한산과 남산자락 등 뚫기 힘든 화강암지대를 지나는 구간이 많아 공사가 어려운 노선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에 불어 닥친 IMF 사태는 당시 진행되던 지하철 건설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 시공을 담당하던 동아건설을 비롯한 여러 건설사들이 외환위기로 인해 워크아웃에 들어가며 공사가 중단되었고, 개통일은 기약 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6호선 공백인 상태로 5·7·8호선은 운행되는 다소 어색한 상황이 몇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공사 시작 6년 반여만인 2000년 8월, 6호선이 개통되며 이를 마지막으로 2기 지하철 공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1993년 서울시에서 발표한 3기 지하철 노선망도. [인터넷 캡쳐]
2기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던 1993년 3기 지하철 계획으로 9호선~12호선까지의 노선이 계획되었습니다. 2기 지하철 이후에도 여전히 역세권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에 놓일 새로운 지하철과 경전철의 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IMF와 경제 불황으로 9호선과 3호선 연장을 제외하고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10호선~12호선의 계획은 전면 백지화되었지만 이 노선도의 일부는 신안산선, 동북선, 분당선 등으로 계승되었습니다.
1·2기 지하철 네트워크의 완성
IMF 구제금융이 몰고 온 한파로 유가가 급등하자 승용차 이용을 자제하고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이 크게 늘었다. 1998년 1월 출근시간 서울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이 붐비고 있다. [매경DB]
1985년부터 2000년까지의 운송수단별 교통분담률(왼쪽), 오른쪽은 1975년부터 2000년까지의 지하철 수송 인원 증감도.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2기 지하철 건설에는 장비 580만 대, 인력 3,600만 명, 레미콘 110만㎥ , 철근 200만 톤 이상이 투입되었습니다. 총연장 204km의 철도노선의 건설비는 9조 7,456억 원에 달했습니다. 6호선까지 완공된 이후 총 교통수송 분담률 가운데 지하철은 35%로 크게 뛰었습니다. 2기 지하철의 경우 1기 지하철 선로와 겹치지 않기 위해 보다 깊은 지하에 역과 선로가 지어졌습니다. 또한 최대한 서울의 많은 지역을 역세권으로 하는 동시에 1기 지하철과의 환승역을 여럿 만들기 위해서 노선 굴곡은 불가피했습니다. 이는 2기 지하철에 해당하는 호선에 탑승 시 유독 쇠가 갈리는 소리가 잦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1994년 4월 서울 성동구 도시철도공사 사옥 앞에서 현판식이 열리고 있다. [서울역사편찬원]
5호선 완공이 임박한 당시 서울시는 5호선의 운영을 어떤 기관이 맡을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가 오갔습니다. 당시 1기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시지하철공사는 방만 경영으로 논란이 일고 있었습니다. 서울시는 시민 여론조사와 공청회, 서울대 경영연구소의 용역결과를 토대로 기존 지하철 공사와는 별개인 새로운 공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합니다. 1994년 3월 서울시 산하기관으로 서울시 도시철도공사가 출범하였고, 이 기관이 지하철 5호선을 비롯해 6·7·8호선의 관리와 운영을 맡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ㅇ「서울지하철건설삼십년사」, 서울시

ㅇ 최항길,「서울 도시철도 120년」, 메이트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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