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성범죄 피해자를 사람으로 느끼도록”…‘재판 감시’ 공부하는 연대자들

이예슬 기자 2024. 3. 10. 15:1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연대자D(활동명)’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된 재판 모니터링 온라인 교육 관련 안내 글. X(구 트위터) 갈무리

“피해자분들이 의견 진술권을 활용하는 걸 권유합니다. 재판부도 피해자가 문서 속 ‘활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걸 느낄 필요가 있거든요.”

성범죄 피해자이자, 익명으로 성범죄 피해 연대 활동을 해온 ‘연대자D(활동명)’가 지난달 24일 ‘재판 모니터링 온라인 교육’을 진행하며 말했다. 연대자D는 이날 교육에서 피해자·연대자들이 적극적으로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재판정이 시민들이 감시할 수 있는 ‘광장’이 돼야, 피해자가 고립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7시 연대자D의 재판 모니터링 온라인 교육 첫 수업에는 수강생 약 30명이 모였다. 연대자D는 고약, 고합 등 기본 재판 용어부터 법원 홈페이지에서 판결문을 검색하는 법, 판결문을 해석하는 법 등 4시간가량 강의를 이어갔다. 그는 “많은 분이 재판부만 비판하는데, 실제 입증 책임이 있는 검사가 제 역할을 하는지 봐야 한다”라며 모니터링 시 유의점을 말했고, “피해자라면 공소장과 증거목록을 요청해 보라”면서 피해자가 준비할 사항을 알렸다.

이른바 ‘바리깡 폭행 사건’ 피해자의 부모님, 박진성 시인 피해자 김현진씨, 부산 돌려차기 피해자 김진주씨(필명) 등 최근 벌어진 젠더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측이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례도 공유됐다. 연대자D는 “피해자가 매번 공판에 참여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며 “다만, 재판부에 피해자도 피고인처럼 ‘살아있는 사람’이라는걸 보여줘야 한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 여러분도 적극적으로 감시해달라”라고 했다.

이날 교육에는 젠더폭력 피해자와 이들을 지지·응원하는 연대자 등이 참석했다. 성범죄 피해자라 밝힌 수강생 A씨(29)는 “재판 당시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 성범죄자 카페까지 들어갔다가 가해자들의 글을 보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다”라며 “이제 연대자로서 활동을 이어가려 교육을 신청했다”라고 말했다. 연대자로 활동 중인 수강생 B씨(35)는 “재판 용어도 어렵고, 과정도 복잡해 막막해서 교육을 신청하게 됐다”라고 했다.

연대자D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판을 방청하는 시민들의 변화가 교육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라고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시민들이 재판정에 자리를 채우고 감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다면, 점차 시민들이 피해자를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 결과”라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익명의 활동가 연대자D가(왼쪽 로고 화면) 경향신문 기자(오른쪽 화면)와 온라인 화상 인터뷰를 진행 중이다.

그는 법정을 향한 시민들의 감시가 늘어나며, 법조계의 태도도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연대자D는 “재판정에서 시민 방청에 대한 바람직한 긴장감도 느껴진다”면서 “몇 년 전만 해도 방청에 적대적이었던 판사가 최근에는 방청을 반기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감시자로 역할을 하는 시민들의 역량이 높아진 영향도 있다. 그는 “과거의 모니터링은 판사 인상비평 정도였다면, 이제는 시민들이 재판 절차를 체크하고, 검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양형의 사유는 무엇인지 꼼꼼히 적고 따진다”라고 했다.

성범죄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이런 활동의 뿌리가 됐다. 그는 “피해자일 당시 내 재판을 강박적으로 모니터하고 매번 의견서, 탄원서를 내자 재판부가 놀랐었다”라면서 “강박에 가깝게 내 재판을 모니터하면서 승소한 것 빼고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다”라고 했다.

통상 형사재판에서 피해자는 당사자인 검사나 피고인과 달리 ‘제3자’로 간주된다. 피해자는 재판 기록에 열람·등사를 신청할 수는 있지만, 허용 여부는 재판부의 재량에 달려 피해자들이 재판에서 소외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는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씨가 증인으로 출석해 이를 지적하기도 했다.

연대자D는 “모든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는 없다”면서 “나서지 못하고 소외된 피해자들은 ‘내가 나서지 않아 내 재판의 결과가 나빴던 게 아닌가’라고 자책하게 되는 상황 역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피해자가 형사재판의 제3자가 아닌 당사자로서 접근성을 보장받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라며 “피해자의 고통을 당연시할 게 아니라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고 존중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법조인이 군림하는 섬”이었던 재판정을 “피해자들이 말할 수 있는 광장”으로 만드는 것이 감시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 연대자들의 목표다.

이예슬 기자 brightpearl@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