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정보 활용 길 나서는 정부…전문가들 “기업 이익만 늘려줘” 비판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엑스레이 이미지·영상 같은 ‘비정형 데이터’ 가명처리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데 이어 ‘가명정보 활용사례 성과 발표회’까지 여는 등 개인 의료 데이터의 산업용 활용 촉진을 위해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개인 의료 데이터는 가명처리를 해도 식별 위험성이 높고, 무엇보다 안전조치를 갖춰 신뢰를 쌓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인 터라 정부의 이런 행보에 대한 우려섞인 목소리도 적잖다.
지난 8일 개인정보보호위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보건복지부·통계청 등 정부 부처 관계자들과 학계·산업계, 가명정보 결합·데이터 전문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명정보 활용사례 성과 발표회’를 열었다. 의료·복지·금융 분야 5가지 가명정보 활용 사례가 발표됐는데, 부천자생한방병원이 진행한 ‘요추 추간판 탈출증(허리디스크) 초진 환자의 진료·처방 정보(부천·대전·해운대 자생한방병원)와 요추 추간판 탈출증 환자 진료내역(건강보험심사평가원) 결합’과 알코올 진단 환자의 사망원인 정보(통계청), 건강보험·알코올 중독 진료 및 처방내역(국민건강보험공단), 알코올 진단환자 진료내역(한림대 춘천성심병원)을 결합한 ‘알코올 중독환자의 정신과적 치료에 대한 효과성 분석’ 연구사례가 포함됐다.
개인정보보호위는 “한방병원의 처방·진료 기록(통증 평가, 엠알아이 검사, 한약·약침치료 정보)과 건강보험 청구 정보를 결합해 요추 추간판 탈출증 환자의 한방치료 효과를 파악했다”며 “척추질환 환자가 한약·약침 치료(비급여)를 받을 경우 수술율이 낮아지는 경향을 가명정보 결합을 통해 확인해 한약·약침 치료의 효과성을 증명했다”고 밝혔다.
앞서 개인정보보호위는 지난 달 4일 이미지·영상·음성 등 정해진 규격이나 형태가 없는 비정형 데이터의 가명처리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가이드라인에는 ‘민감정보’로 간주하는 의료 데이터도 포함됐는데, 시티 사진 등에서 환자 이름과 환자번호·생년월일 같은 기본 정보를 지우고 추가적인 기술적 처리를 하면 해당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의료계에선 “위험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위원장은 한겨레에 “개인에서 비롯된 이미지·영상 등 비정형 의료·보건 데이터는 개인의 ‘지문’과도 같은, 그 자체로 식별 가능한 정보”라며 “환자번호 정도 지웠다고 ‘비식별화 조치했다’는 건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데이터를 활용하려는 목적 자체가 인공지능 학습 등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개인을 추적(트랙킹)하는 게 핵심인데, ‘가명 처리했으니 개인 식별 문제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부가 나서서 개인 의료·보건 데이터 활용을 부추기는 게 ‘공공의 이익’이 아닌, 기업들이 이익 추구에 나서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결과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혈액검사 결과 같은 개인에게서 유래한 건강정보는 사회·경제적 가치가 상당한데, 이 가치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사회적 논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의 의료 데이터 활용 길을 터주는 건 이 정보를 이용하려는 기업들만 이득을 가져가게 되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정형준 위원장도 “건강보험심평원 등 공공기관에 개인 건강 정보를 제공하는 건 ‘공공기관은 공적 이익을 위해 건강 정보를 활용한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라며 “기업들이 건강 데이터로 연구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해 얻은 이익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가 나서서 의료·건강 데이터 활용 길을 터주는 건 기업들의 이익을 늘려주는 것밖에 안된다”고 비판했다.
박지영 기자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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