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그룹 중심으로 더욱 소프트해진 K팝
(시사저널=김영대 음악 평론가)
투어스(TWS)의 신곡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는 담백하다. 그렇다고 힘이 없거나 세련미가 부족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비트는 제법 육중하다. 《밤양갱》 수준의 중독성까진 아닐지 몰라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이 노래는 샤방하고 화사해 청량감을 가지고 있다. 마치 '음료 광고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맑고 깨끗한 분위기가 감돈다. K팝에서 젊음의 특권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아마 이처럼 청량하고 싱그러운, 그야말로 '소년미'가 흐르는 보이그룹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순간이 지나면 그 어떤 콘셉트와 기획으로도 되돌리기 힘든, 그야말로 스냅샷과도 같은 한순간의 포착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어스와 같은 보이그룹이 만들어내는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도 동시대를 사는 팬들의 특권일 것이다.
보이그룹까지 침투한 '이지 리스닝' 열풍
지난해부터 K팝에 새로운 흐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아마 그 단초는 몇 년 전, 뉴진스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르다'는 말밖에는 딱히 다른 수식어를 떠올리지 못했던 《Attention》의 충격. 이후 K팝은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소위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열풍이 그것이다. 이지 리스닝은 말 그대로 듣기 편하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의 곡을 말한다. 듣기는 쉽지만, 촌스럽거나 허술해선 안 된다. 정서적으로 트렌드와 복고를 두루 겸비하는 초월적 보편성이 확보돼야 하며, 무엇보다도 직관적으로 음악과 메시지가 설명 없이 확 와닿아야 한다. 뉴진스의 등장이 그러했고, 아이브와 피프티피프티 등 걸그룹이 이 흐름에 동참해 하나의 K팝 대세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흐름이 이제는 보이그룹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보다도 훨씬 큰 뉴스다.
SM이 새롭게 선보인 보이그룹 라이즈(RIIZE)의 신곡 《Love 119》는 복고적인 음악 분위기와 뮤직비디오의 옛스러운 톤을 통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히트곡 《응급실》을 샘플링하는가 하면, 전반적인 곡조에도 최근 남자 아이돌 음악과는 다르게 아련하고 푸근함이 감돈다. 사운드는 '예각'을 다듬어 둥글게 마무리돼 있다. 창법 또한, 과거 아름답고 슬픈 발라드에서도 강렬한 창법으로 특유의 강함을 과시했던 SM 남자 아이돌의 음악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자 아이돌의 음악에 가깝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이 같은 흐름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보이넥스트도어'나 '제로베이스원' 등의 음악에서도 제법 일관되게 발견된다. '저탄산 무설탕'같이 톡 쏘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달지만 건강한 음악이다. 분명 남녀를 불문하고, 지금의 K팝이 추구하는 경향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뉴진스로 시작된 '이지 리스닝' 계열의 걸그룹 음악들이 결국 보이그룹에까지 영향을 미쳐 새로운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뉴스지만, 이러한 현상을 두고 '왜?'라는 의문이 든다. 한두 마디로 쉽게 정리할 수 없지만, 보이그룹과 걸그룹이 모두 비슷한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순히 음악적 장르 유행 이외에 좀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직관적이고 쉬운 음악이 이제 하나의 '시대정신' 트렌드가 됐다는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은 20여 년 전에 음반 위주의 '듣는 음악'에서 TV나 유튜브 등 '보는 음악'으로 바뀌는 혁명을 겪었다. 근데 또다시 음악의 트렌드가 변하고 있다. 보는 음악에서 이제는 대중이 '참여하거나 따라 하는 음악'으로 바뀌고 있다. '틱톡'을 포함한 각종 숏폼 콘텐츠와 그 플랫폼이 대표적이다. 대중음악은 이제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느냐가 중요해진 산업이 됐다. 이제 그걸 가능케 하는 핵심은 간결하고 쉽지만, 인상적인 라인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다. 몇십 초 안에 모든 매력을 전달해 승부를 내야 하는 대중음악이 더 짧아지고, 쉬워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대중음악이 강한 '후크'를 가지면 유리하다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제 그 쉬움의 목적이 최근 유행하는 '챌린지'와 같이 대중이 쉽게 참여하는 콘텐츠로 변한 것이다.
간결한 멜로디 통해 강한 인상 남겨야
음악 콘텐츠는 단순히 '소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차트에서의 인기나 롱런의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지난 20년간 K팝은 선진 음악 산업 내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그들에게서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냈다. 집중적으로 키워낸, 일종의 2등 전략에 가까웠다. 물론 이 전략은 지금도 유효하다. 영미권 팝음악 산업에서 그룹 위주의 '틴' 팝은 지속성 없이 돌고 도는 유행에 가깝고, 일본에서의 '아이돌'은 특정한 하위 문화를 가리킨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 아이돌은 최신 트렌드와 첨단의 만듦새, 그리고 넓은 팬덤을 두루 거느린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음악이다. 어느새 K팝, 특히 아이돌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의 대표 산업이 됐고, 이제 이 음악은 팝의 종주국 미국에서 하나의 하위 '카테고리'로까지 인정받고 있다.
K팝은 이제 아시아권 중심에서 막 미국 및 북미 시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전례 없이 폭넓은 선진 음악팬들을 잠재적인 고객으로 유치할 꿈을 꾸게 됐다. 이에 따라 K팝은 기존 팬들에게 익숙한 음악적 문법이나 코드를 가진 K팝 대신 누구나 쉽게 듣고 즐길 수 있는 보편적 K팝으로 변모를 꾀하게 된다. 이제 중요한 건 콘텐츠의 퀄리티다. 뉴진스가 데뷔 1년도 안 돼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은 단순히 그들의 음악이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떠한 새로운 영감을 대중과 창작자들에게 던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을 간과한다면, 이지 리스닝을 꾀하는 새로운 K팝 흐름이 '저탄산 무설탕'의 청량함이 아닌 '김 빠진 탄산음료'의 함정에 빠지게 될 위험성도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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