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성평등 개헌 국민투표 부결…왜?
아일랜드 헌법에 규정된 여성의 가정 내 역할 및 가족의 정의에 관한 조항을 개정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큰 차이로 부결됐다.
9일(현지시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전날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실시된 국민투표 개표 결과 투표자의 대다수가 개헌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개헌을 추진했던 레오 바라드카 아일랜드 총리는 “상당한 표 차로 개헌안이 부결됐다”면서 “사람들이 ‘찬성’에 투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었지만, 분명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과를 전적으로 존중할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의 아일랜드 헌법은 돌봄을 가족 내 여성의 의무로 규정하고 결혼을 근거로 가족을 정의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여성의 성역할을 고정시키고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헌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이에 지난해부터 아일랜드 정부는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을 규정한 조항을 삭제하고, 헌법상 가족의 정의를 확장하기 위한 개헌을 추진해왔다.
개정안은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을 규정한 표현을 삭제하고 대신 “가족 구성원이 유대관계에 따라 서로 돌봄을 제공해야 공공선을 달성할 수 있음을 국가가 인정하고 지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 비혼 부모 등 그간 공식적인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헌법상 권리와 보호를 보장하기 위해 가족의 정의를 ‘결혼에 기초한 가족’에서 ‘지속 가능한 관계’로 확대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 가족의 정의를 ‘지속 가능한 관계’로 변경한 조항에 대해서는73.9%, 가족 내 여성의 돌봄 의무를 삭제한 조항에 대해서는 67.7%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예상보다 높은 반대 비율에 정부와 옹호 단체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일랜드 주요 정당들은 대부분 이번 개헌안에 찬성 입장을 표해왔다.
개헌안이 예상 외로 큰 차이로 부결된 것은 정부가 유권자들의 분위기를 잘못 판단하고, 개헌 캠페인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변화가 필요한 이유를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으며,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냈고, 일부 이해관계자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리머릭 대학 로스쿨의 로라 케헬린 교수는 아일랜드 공영방송 RTE와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때 반대표를 던지고 변화를 거부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번 국민투표는 투표율은 44.4%로 역대 아일랜드 국민투표 중 가장 낮았다. 아일랜드는 국민 다수가 가톨릭 신자지만 2018년 임신중지 금지법 폐지와 2015년 동성결혼 합법화 국민투표는 모두 60% 이상의 투표율을 보이며 통과됐다.
헌법 개정안의 표현이 혼란스럽다거나 개헌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상당했다. 개정안의 표현이 너무 모호해서 수많은 법적 논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가족의 정의를 확대하면 세금이나 시민권 규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또 일부에서는 돌봄의 부담을 여성에서 가족 전체로 확대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반발도 제기됐다. 일부 여성·진보 단체에서는 개정안이 너무 제한적이고 무의미하다며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질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개헌안이 부결되자 여성단체들은 큰 실망감을 표현했다. 전국여성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개헌안이 부결된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이번 결과는 평등과 여성의 권리라는 문제에서 우리가 결코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밝혔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283189?type=journalists
최서은 기자 ciel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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