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회장이 스포츠단체장 맡는 걸 돌아보게 한 '아시안컵 참사' [Deep&wide]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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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막을 내린 AFC 아시안컵은 한국 축구의 오랜 숙원이었다. 명실상부한 아시아 대륙 최강자를 결정하는 무대인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1960년 이후 단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일본이 무려 4차례나 우승을 차지하며 대회 최강자의 자리를 굳히는 동안, 한국 축구는 4개국이 참가한 첫 2개 대회 우승 이후 늘 도전자에 머물렀다. 그러니, 손흥민(토트넘)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강인(PSG) 등 역대 최고 멤버를 보유한 이번 대회에서 64년 만의 우승을 노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승 확률을 높이기 위해 대회 유치까지 노렸던 대한축구협회 역시, 팬들의 숙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향을 잘못 잡았다. 카타르월드컵을 끝으로 떠난 파울루 벤투 감독의 뒤를, 위르겐 클린스만이라는 졸장에게 맡긴 것이다.
클린스만은 사실상 감독 커리어가 끝난 축구인이었다. 자국에서 열린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 감독을 맡았지만, 실질적인 감독 역할은 명석하지만 아직 무명이던 요하임 뢰브의 몫이었다. 본격적인 감독 경력은 바이에른 뮌헨 지휘봉을 잡으며 시작됐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회자될 만큼 최악의 부진에 빠진 끝에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가장 오래 팀을 이끈 미국 대표팀에서 역시 수준 이하의 훈련법과 의외의 선수 기용으로 늘 논란에 휩싸였다. 마지막 감독 경력인 독일 분데스리가 헤르타 베를린에서는 부진한 성적으로 팬들에게 비난받던 중, 구단과 상의도 없이 SNS 라이브 도중 감독직을 내던진 인물이 클린스만이었다. 전술적으로도, 팀을 관리하는 능력으로도, 팬이나 구단에 대한 신의 측면으로도, 한 나라 대표팀의 감독을 맡을 만한 역량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대한축구협회는 그러나 클린스만에게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직을 맡겼고, 클린스만은 불과 10개월 사이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처참히 망가뜨렸다.
대륙 대회 4강을 나쁜 성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클린스만호는 예외다. 클린스만은 아시안컵 우승을 자신하며 그간 자신의 모든 기행을 정당화해 온 인물이다. 대회 성적을 놓고 봐도, 조별리그에서 단 1승에 그쳤고 16강과 8강에서는 모두 연장전을 거쳤다. 승부차기와 손흥민의 극적인 프리킥으로 힘겹게 4강에 진출하는 사이, 주요 선수들의 체력은 고갈됐고 오랜 기간 뛰지 못한 다른 멤버들의 경기 감각은 떨어졌다. 몇 달에 걸쳐 같은 전술, 거의 같은 선수 기용이 반복되면서 상대는 클린스만호의 축구를 낱낱이 분석할 수 있었지만, 클린스만 감독은 상대의 기본 전술이나 경기 중 변화 과정에 둔감한 채 에이스들의 개인 기량이 터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처럼 부실한 지도력은, 그가 지난 10개월간 보여준 한량 같은 근무태만으로 응축된 축구팬들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대한축구협회는 국가대표팀 감독이 한국에 체류하지 않고 틈만 나면 본가(미국)로 돌아가는 행태를 옹호했다. 또 별다른 이유 없이 유럽 순방(!)을 다니는 기행도 오히려 지원했다. K리그는 보는 시늉만 했고, 그나마 코칭스태프들이 직접 보고 추천한 선수들 중에서 취사선택을 했을 뿐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의 원석을 발굴하고 다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자신의 미국 집 서재에 앉아 ESPN 방송에 화상전화로 고정 출연하며 유럽 챔피언스리그나 손흥민의 토트넘 축구를 분석했다. 화면에는 자신이 선수 시절 받았던 트로피들 옆으로, KOREA 글자가 박힌 머플러가 한 장 늘어뜨려져 있었다. 대한축구협회가 상식을 깨면서까지 클린스만의 근무태만과 외도를 방치한 셈이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투잡’ ‘스리잡’을 뛰며 팀 아닌 개인을 앞세운 활동을 반복했지만, 이에 대한 걱정과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클린스만이 이 지경으로 엉망진창 근무 패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협회 내에서 오직 정몽규 회장과 직통으로 소통을 해왔기 때문이다. 대한축구협회 내에서 클린스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늘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정몽규 회장뿐이었다. 협회 임원이나 심지어 홍보팀 사람들도, 기자들이 종종 클린스만 감독의 현재 위치를 물을 때 즉답을 내놓지 못했다. 국내 체류가 필수라던 부임 초기의 확언은 낡은 파주 트레이닝센터에 머물고 싶지 않은 클린스만의 편의에 따라 뒤집혔고, 급기야 클린스만은 작년 8월 대표팀 명단 발표 기자회견마저 없애버렸다. 그러더니 9월에는 웨일스전이 끝난 후 상대팀 선수 유니폼을 얻어가는 추태를 부렸고, 닷새 뒤 뉴캐슬에서 열릴 예정이던 사우디전을 앞두고 런던에서 첼시 자선경기에 출전하려는 뜻을 밝혀 빈축을 사기도 했다.
유럽에 남아 개인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던 클린스만은 부정적인 국내 여론을 의식한 대한축구협회의 설득으로 한국에 온다. 입국 뒤 공항 인터뷰에 나선 클린스만은 잔류하려던 일정을 왜 변경했냐는 질문에 “당신들이 오라면서요”라고 답했고 “아시안컵 우승 못하면 그때 비판하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5일 만에 다시 미국 집으로 돌아갔다.
축구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축구 감독의 연봉이 여타 스포츠에 비해 훨씬 고액이라는 게 이를 방증한다. 한 나라의 축구를 상징하는 국가대표팀을 이끄는 감독을 뽑는 과정이 투명하고 전문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협회장이 간택한 부적절한 인물에게 감독직을 맡겼다. 그 결과, 불과 13개월 전 같은 장소에서 벤투 감독 체제로 우루과이, 포르투갈과 대등한 경기를 하던 대표팀은 말레이시아와 비기는 등 아시아 대회에서 90분 내에 단 1승밖에 거두지 못한 팀으로 전락했다.
클린스만 감독의 선임과 관리, 또 해임에 이르는 과정은 정몽규 집행부가 대한축구협회를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만천하에 압축적으로 드러냈다. 비전문가인 재벌 회장의 ‘톱다운’ 지시가 한국 축구를 이끄는 조직의 유일한 지령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내부에 그러한 일방적인 운영에 제동을 걸 장치도 의지도 없다는 것, 이런 체제가 무려 12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것. 심지어 아시아 축구계에서도 사실상 ‘왕따’처럼 인식되어, 각종 선거나 유치전에서 0표를 받는 수모까지 겪을 만큼 축구 외교도 빵점이라는 것. 단순히 아시안컵 4강의 성적 때문에 회장 사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 단체의 회장을 기업체 수장들이 맡던 관례는 재점검되어야 한다. 특히 대한축구협회처럼 막대한 규모의 예산 대부분이 회장 출연금이나 회장 유관 기업의 기여 없이 무탈하게 운영될 수 있는 단체라면 더욱 그렇다. 2024년 대한축구협회 예산(1,876억 원) 중 축구종합센터 건립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한 일반예산은 1,021억 원이다. 그중 스폰서십, A매치 수익 등 자체 수입이 635억 원이고, 스포츠토토 지원금(225억 원), 국민체육진흥기금(108억 원)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세계 수준의 선수들이 배출되고 국내 지도자들의 수준도 나날이 발전하는 요즘, 대한축구협회는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축구가 단순히 공놀이일 뿐일지 모르지만, 축구만큼 전 국민의 관심을 한데 모으는 대상도 흔치 않다. 누군가의 하루를, 한 달을, 1년을, 들었다 놨다 하는 축구가 조금이라도 정상화될 수 있다면, 사회 다른 영역에도 긍정의 효과를 건넬 수 있지 않을까. 흔한 축구팬의 망상만은 아닐 것이다.
서형욱 MBC축구해설위원 유튜브 ‘뽈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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