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잘릴지언정 머리는 못깎아”...결사반대하던 ‘이곳’ 100년후 한류명소 대변신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3. 1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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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핫플로 떠오른 명동 변천사 100년
명동 우측의 삼일로 확장공사 모습(1967년 3월 18일 촬영). 왼쪽에 명동의 상징인 명동대성당이 보인다. 명동은 충무로 1, 2가, 명동, 저동은 물론 회현동, 남산쪽의 예장동, 남산동 일대를 포괄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외관을 정제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오경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전적을 얼음에 박 밀 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 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일석 이희승(1896~1989)의 수필 <딸깍발이>의 한 대목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의 한문소설 <허생전>도 아내의 삯바느질에 의지해 근근히 연명하면서도 수공업이나 장사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남산 기슭 초가삼간의 선비가 주인공이다.

조선후기 이후 서울의 남촌(南村), 즉 남산골에는 몰락한 사족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다.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은 “서울 큰 거리(종로)를 사이에 두고 종각 이북은 북촌이라 하여 노론이 살고, 큰 길 남쪽은 남촌이라 하여 삼색(소론, 남인, 북인)이 섞여 살았다”고 했다. 지방에서 한양으로 진출한 사림세력들이 처음에 터를 잡은 곳도 남촌이었다.

남촌 중에서도 진고개에 가난한 선비들이 유독 많았다. 진고개 선비들은 굶기를 밥 먹 듯 하면서도 과거에 급제하는 그날만을 기다리며 글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권력을 쥔 세도가들이 과거마저 독점해 가난한 양반이 시험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했다. 진고개 선비들은 비가 와 고개가 질어지면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사람들은 “딸깍, 딸깍”하는 나막신의 소리를 본떠 ‘오기만 남은 불운한’ 진고개 선비들을 ‘남산골 딸깍발이’ 또는 ‘남산골 샌님(생원님)’으로 놀렸다.

남촌은 충무로, 명동, 저동을 중심으로 회현동, 주자동, 남산동, 예장동, 필동 등을 포괄한다. 오늘날 ‘명동(明洞)’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명동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명례방(明禮坊·한성부 남부 11개 방 중 하나)에서 유래했다.

명동성당 옆 골목 비만 오면 진창길, 진고개 명칭 여기서 유래
도성도 일부(조선말기) 푸른 원 안에 명례방이 있다. 명례방은 명동의 조선시대 명칭이다. 명례방과 종현(진고개) 사이로 지금은 복개된 남산동천(南山洞川)이 흘러가고 있다. 이 개천으로 인해 진고개가 생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진고개는 현재 명동에서 명동대성당(명동2가 1-1)을 거쳐 남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말한다. 남산에서 발원한 남산동천(南山洞川)이 명례방과 진고개 사이를 통과해 청계천으로 흘러갔다. 지금은 복개된 하천이다. 이로 인해 땅이 항상 질척거렸고 비가 한 번 오면 골짜기 물이 범람해 사람의 통행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진고개라는 명칭이 생겼던 것이다.

진고개는 조선시대 ‘종현(鐘峴)’이라고도 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진을 치면서 시간을 알리기 위해 남대문의 종을 옮겨 단데서 유래한다. 후대에 북을 달았다고 해서 ‘북달재’라고도 했다. 진고개는 1907년(광무 10) 8척(2.5m)이나 흙을 파내 고개를 낮추고 하수도를 묻으면서 자취를 감춘다. 이는 서울시내 하수구 도랑의 시초가 됐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 명동성당(사적 제258호)은 종현성당으로 호칭되며 건립 당시부터 명동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성당은 침계 윤정현(1793~1874)의 집터에 세워졌다. 윤정현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고 성균관 대사성, 이조·예조·병조·형조 판서, 판의금부사(종1품)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청빈한 삶을 살아 고종이 명동성당 일대 대지와 저택을 하사했다고 알려졌다. 파리 외방전교회 조선교구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1887년 윤정현 가옥을 구입해 성당을 짓기 시작했고 1898년 완공했다. 높디높은 명동성당 첨탑에서 덕수궁 내 궁녀 모습도 훤히 내려다보여 각 전각에서 발을 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명동성당 모습(19세기말~20세기초) 명동성당은 우뚝 솟은 언덕에 위치해 건립당시부터 명동의 명소였다. 진고개(종현)에 세워져 종현성당으로도 불렸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사실, 지대가 높은 남산골은 도성이 한눈에 조망돼 여러 걸출한 가문이 터전을 잡기도 했다. 정조때 명신으로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한 홍양호(1724~1802)가 진고개 주민이었다. 그의 문집 <이계집>은 “남산 아래에 진고개(泥厓)가 있다. … 내가 고갯마루에 집을 짓고 이와(泥窩·진흙 움집)라 이름하였다”고 했다.

시조작가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1587~1671) 또한 진고개에 거주했다. <동국여지승람>은 윤선도의 집터(명동1가 1-3)가 제비 형세의 명당이라 했다. ‘한국형 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 이회영(1867~1932), 이시영(1868~1953) 형제의 집도 진고개에서 가까웠다. 이회영 6형제는 막대한 재산을 처분하고 전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들의 아버지이자 이조판서, 우찬성을 지낸 이유승(1835~1907)의 가옥이 명동 서울YWCA 자리(명동 1가 1)다. 이회영 형제는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다.

권력서 배제된 사족들 주로 거주...전주이씨·동래정씨·경주이씨 등 명문가도 세거
이회영 집터(현 서울 YWCA) 명동에는 명문가들도 다수 세거했다. 이회영 6형제는 막대한 재산을 처분하고 전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회영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그의 가문은 숱한 정승, 판서를 배출했다. [중구문화원]
고종때 포도대장을 한 이경하(1811~1891)는 낙동(駱洞·명동2가 83·중국대사관)에 거주했다. 흥선대원군 집권시 훈련대장, 금위대장, 형조판서를 역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낙동 집에서 죄인들을 심문해 사람들은 그를 염라대왕처럼 무서워하며 ‘낙동염라’로 호칭했다. 특히 천주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침략의 실상을 고발했던 이위종(1887~?)이 그의 손자다.

장흥동(長興洞·남창동)과 회현동, 소공동이 속한 호현방(好賢坊)은 경화세족(京華世族) 가문 밀집지다. 동래 정씨들은 우리은행 본점 뒷편(회현동 1가 203)에서 대대로 살았다. 중종 때 삼정승을 한 정광필(1462~1538) 집안에서 정승이 무려 12명이나 배출됐다.

고종때 영의정을 한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는 “정광필의 회현방 옛집은 바로 신선이 ‘큰 은행나무 아래에 12개의 서대(犀帶·1품 관리가 차던 띠)가 묻혀있다’고 알려준 곳”이라고 했다. 회현(會賢)지명도 정씨 현자들이 많이 모여산다고 해서 붙여졌다. 집터에는 수령 500년 은행나무가 남아있다. 청송 심씨도 장흥동에 세거했다. <임하필기>는 “심희수(1548~1622·양관 대제학과 좌의정 역임)의 고택 곁에 소나무 한그루가 자랐는데 그의 호 일송(一松)은 여기서 딴 것”이라고 했다.

왕손인 전주 이씨 문중에서 가장 번창한 백강 이경여(1585~1657) 가문은 남산동3가 34-5 옛 영화진흥공사(현 리빙TV 사옥) 위치했다. 이경여는 숭명배청파 핵심인물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아 심양에 억류됐다. 그의 직계후손에서 3대 대제학과 6명의 정승이 나왔다.

격동기 중국·일본세력 차례로 명동 잠식...청일전쟁 이후 일본상인 독무대
남산에서 바라본 명동 일원. 뽀족한 첨탑의 명동성당 우측으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건물이, 좌측으로 사제관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성 베네딕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서울사진)]
격동기 명동은 외세의 본거지로 전락한다. 1882년(고종 19) 발발한 임오군란 진압을 빌미로 서울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는 공관 설치와 중국인 거류를 합법화하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한다. 1883년 경복궁과 한성부 청사에 가깝고 경치가 뛰어난 포도대장 이경하 집을 매수해 공관을 설치했다.

이경하의 아들 이범진이 땅 매각을 거부하자 납치·폭행해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무역장정 체결후 청나라 산동현 중국인들이 물밀듯 밀려와 명동과 소공동, 수포동에 자리잡았다. 1885년 원세개가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조선에 부임하면서 명동에는 차이나타운이 형성됐고 청병들은 길입구에서 조선병사와 조선인의 통행을 막으며 행패를 부렸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상인과 청국상인의 위치가 바뀐다. 청국 상인들이 문을 닫고 귀국했으며 요릿집만 남아 장사를 했다. 일본은 임오군란후 개화파 박영효 집(종로 관훈동 경인미술관)을 영사관으로 삼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으로 소실됐다.

그뒤 일본군은 남산 북쪽기슭의 예장동에 주둔했다. 예장(藝場)은 조선시대 5군영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는 훈련장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일본은 임진왜란때 왜군이 이곳에 주둔했다며 거류초기부터 왜성대(倭城臺)로 명명하고 성역화했다.

일본은 조선정부를 압박해 예장동 2-1의 녹천정(綠泉亭·철종때 영의정 박영원의 정) 터를 확보하고 1894년 건물을 지어 공사관으로 사용했다. 공사관 건물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통감관저로, 1910년 국권강탈 이후에는 총독관저로 쓰였다. 1939년 경복궁 후원 경무대에 총독관저를 신축해 이전했다. 광복후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등으로 활용되다가 철거됐다.

조선총독부(일제강점기) 남산 조선총독부(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쪽에서 바라본 남산 모습. 총독부 뒷쪽으로 경성신사(현 숭의여대)와 메이지시대 일본 군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기리는 노기신사(현 리라초교)가 보인다. [국립민속박물관]
통감관저터(예장동 2-1). 남산 총독부 아래에 위치한다. 광복후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등을 활용되다가 철거됐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조성돼 있다. [중구문화원]
왜성대 위쪽에는 1898년 일본거류민단이 주도해 경성신사(예장동 8-3·현 숭의여대)를 세웠다. 숭의여대와 붙은 리라초교(예장동 8-6)에는 러일전쟁때 군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기리는 노기신사가 설치됐다. 그 아래 예장동 8-145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통감부 청사, 1910년부터 1926년까지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존재했다. 1926년 총독부가 경복궁에 새 청사를 짓고 옮겨가자 1927년부터 과학관으로 개편됐다.

총독부 터에는 1999년 설립된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서 있다. 서울시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뜻에서 ‘조선통감관저 터-조선총독부 터-노기신사 터-갑오역기념 터-경성신사 터-한양공원비석-조선신궁 터(옛 남산식물원)’로 이어지는 서울 남산 예장자락 1.7㎞에 ‘국치의 길’을 조성했다.

남산 아래 예장동에 경성신사·조선총독부 설치···서울시, ‘국치의 길’ 조성
신세계백화점(충무로 1가 52)도 일본 흔적이 남겨져있다. 1895년~1905년 일본영사관이 위치했다. 일본영사관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며 폐지되고 대신 지방행정을 감독하는 경성이사청이 들어왔다. 경성이사청 땅은 1929년 일본상인에 불하돼 당시 조선, 만주를 통틀어 최고 백화점이라는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지어졌다.

미쓰코시는 1954년 11월까지 미군 PX로 이용됐다. 일본인들은 1905년 통감부 설치와 더불어 급격히 증가했다. 그 수는 1910년 이미 9000명에 이르렀다. 거류의 중심에 충무로가 있었고 일본 본국을 뜻하는 혼마치(本町通)라 했다. 일본상인들은 점점 그들의 거점이었던 남촌에서 벗어나 부동산 매입을 통해 경성부 동부 및 서부까지 영역을 확대했으며 한국상인들의 오랜 거점인 북부까지 침투해 한국상인들은 외곽으로 밀려 쫓겨갔다.

해방이후, 명동은 영화예술을 비롯한 영상산업의 요람으로 자리잡으며 ‘한국의 헐리우드’로 부상한다. 한국영화 발상지 하면 당연히 ‘충무로’다. 그 시작은 명동 세종호텔 뒷골목의 충무로 1가, 2가였다. 명동과 충무로에 포진했던 수많은 영화제작사들이 1990년대 중반이후 강남 등지로 터전을 옮겼지만, 여전히 충무로는 한국영화의 성지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한적한 변두리였던 명동, 한류 명소로 우뚝
명동은 글로벌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중구문화원]
서울의 한적한 변두리였던 명동은 오늘날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도심으로 탈바꿈했다. 상업, 금융, 유통의 본거지이자, 문화·예술, 유행의 용광로였고 이제는 K컬쳐가 확산하면서 중국인, 일본인 등 외국인이 밀집한 명실상부 글로벌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딸깍발이>에서 이희승은 “임란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단석(旦夕·짧은 시간)에 박도(迫到·다가옴)됐을 때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두목들도 다 이 딸깍발이 기백의 구현인 것은 의심 없다”며 단발령이 내렸을 때 목이 잘릴지언정 머리는 깎을 수 없다며 맹렬히 반대한 것 역시 죽음을 개의치 않고 덤비는 의기라고 했다.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돈이나 출세에 연연하지 않는 고지식한 선비들의 본고장이던 남산골이 외세의 거점에 이어, 서울 상업의 중심지, K문화·관광의 1번지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1. 매천야록(황현).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이계집(홍양호). 임하필기(이유원)

2. 명동변천사. 중구향토사자료 제7집. 중구문화원. 2003

3. 서울 문화유산 답사 1번지 중구. 중구향토사자료 23집. 중구문화원. 2022

3. 심능숙의 남고시사 연구. 진민희. 성균관대. 2023

4. 이희승의 ‘딸깍발이’에 나타난 선비관 비판. 김영환. 선도문화 제20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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