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은 쉰 김치 먹일 때도 나라가 우선” 노병 일기로 본 베트남전
“베트남전과 참전군인 바라보는 양가적 시선, 그 지점이 대화 주제”
‘이렇게 작전에 나와서 체험을 하여 보니 생의 가책, 죽음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다. 이따금 우리의 행군에 따라 새소리가 이상히 들린다. 나는 아직 모르지만 작전에 참가를 오래 한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적의 신호 방법이란다. 그럼 적은 왜 자꾸 나의 옆에서만 울고 있는지! 무섭다.’(1968년 3월18일)
‘2단계 작전이 시작될 날도 머지않았는데 적정(적의 사정)을 알기 위해 보낸다니 욕심도 많다. 정말 높으신 분들이 우리 사정을 좀 천분의 일이라도 이해했으면.’(1968년 5월23일)
이것은 한 참전군인의 손때 묻은 일기다. 백마부대 제29연대 10중대 관측장교였던 박병조(78)씨는 1968년 2월부터 10개월 동안 베트남 전장에서 겪은 일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일기에는 전과(전쟁 성과)를 향한 지휘관의 욕망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병사들의 심리, 적을 향한 적개심 등이 가감 없이 담겼다.
베트남전은 대한민국 국민 32만 명이 전투병으로 참전해 5천 명이 전사한 전쟁이다.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구체적 참상은 베일에 가려 있다. 베트남 파병 60년을 맞은 2024년, <한겨레21>은 청룡부대 병사 송정근씨의 고백(제1496호)을 시작으로 베트남전에 관계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참전군인들의 생생한 진술을 통해 한국 사회의 파병 결정을 성찰하고,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민낯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전장 일기’의 주인공 박병조씨를 2024년 2월16일 충북 보은에 있는 자택에서 만났다.
전쟁터의 ‘전과’ 압박
인간의 목숨을 앗기 위한 싸움에서 성과를 따지는 건 괜찮은 일일까. 하지만 막상 전쟁을 마주하면 참전한 병사들과 지휘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과 압박을 받는다. 이 전과가 거시적으론 전쟁의 승패를, 미시적으론 지휘관과 부대의 실적을 좌우한다. 박씨 일기에도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가 ‘전과’였다. 박씨는 포 쏘는 지점을 찾는 관측장교여서 상대적 압박감이 덜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속 중대의 전과를 자주 걱정했다.
‘…아직 아무런 전과는 없고 피해만 있으니 어찌 오늘의 전과를 기대할 수 없는가. 아무런 전과 없으면 얼마나 백마의 위신과 따이한의 용맹이 떨어지는데.’(10월24일)
‘전투를 하면서 적을 만나고 반갑다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주한군은 누구나 같은 생각이다. 이렇게 적을 만나기 힘들고 만나면 잡고 말았기 때문이다.’(5월15일)
‘전과가 없어서 그런지 4~5일 작전을 연장한다고 한다.’(7월16일)
아군 피해 입으면 질책에 징계도
병력 손실에 민감하다보니 아군이 피해를 입으면 질책받거나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박씨의 일기에도 ‘우리 중대가 전과도 없이 피해만 있어서 그런지 좀 고생을 시키는 것 같다’(7월11일)며 불편해하는 대목이 나온다.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이 수시로 전과 압박을 받았다는 대목은 미국 언론인 닉 터스의 책 <움직이는 것은 다 죽여라>에도 나온다. ‘야전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진급하기까지 통상 6개월의 시간이 허락된 하급 장교들과 그 예하 병력은 적군을 사살하라는 끊임없는 압박을 받았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공수 지원도 줄어들어 헬기를 타고 기지를 오가는 대신 길고, 덥고, 위험천만한 지형을 타고 넘어다녀야 했다.’
시시각각 목숨 위협, 아군 사상자도 상당
전쟁터는 시시각각 군인의 생명을 위협한다. 박씨가 동굴 습격 작전에 참여한 어느 날이었다. “앞에서 막 총소리가 나더니만 앞 소대 병사들이 당했더라고. 시체들이 막 뒤로 끌려나오는데 우리도 진격도 후퇴도 못하고 거기 그대로 서서 경계했지. 그 상태로 해가 지고 밤이 된 거야.”
사방이 어두워지자 헬기가 조명탄을 쏘며 상공을 돌았다. 헬기에 탄 사단장은 확성기를 통해 “너희들은 안전하다” “조명탄은 모기 때문에 피운 거니 걱정 말라”고 연신 소리쳤다. 박씨와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밤새 밀림 속에서 대기했다.
며칠 뒤 작전회의에 참여한 박씨는 그제야 그날 자신이 사방의 적에게 포위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적군이 어둠 속에서 박씨 소대를 겨눈 상태에서 국군 헬기가 공중에서 적들을 겨누며 밤새 대치한 거였다. “이게 전쟁이구나, 그날 죽을 수도 있었구나 했지. 지휘관이 병사들을 그렇게 보호해준 게 고맙기도 했고.”
불발탄, 오발탄…아군에 의한 허무한 죽음들
포병이던 박씨는 무엇보다 포 쏘는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야 했다. 한 치라도 오차가 나면 아군이 죽을 수 있었다. 실제 전쟁터에선 적군에 의한 사상자뿐만 아니라 아군에 의한 사상자도 만만치 않았다. 박씨 일기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불발된 유탄 폭발로 6명 중경상. 조용하더니 또 터졌구나. …물론 교육 불철저에서 나온 거겠지만 직접 피해는 누구냐. 조심해야지. 몸 성히 있다 귀국하는 게 가장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 되는 거다.’(6월12일)
‘작전을 나가 저격을 당하였다더니 알고 보면 우리 4.2''(4.2인치 박격포)에 2명이 맞아 죽다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냐. 월남에 와서 살아가는 것이 최대의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요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건만 어찌 지휘관들은 그다지 전과에 눈이 어두운지 모르겠다. 아군 위치에서 근접거리에 정확지도 못한 4.2'' 사격을 가하다니….’
“작전지에서 만나면 베트콩”이라지만
박씨의 말처럼 병사 개인 입장에선 몸 성히 귀국하는 것이 애국이다. 하지만 참전한 국가 입장에선 병사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워 전과를 올리는 것을 애국으로 여겼다. 군인들은 두 가지 모순적 명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작전한다 그러면 안 나가려고들 하지. 어디 아프다, 어떻다 핑계를 많이 대지. 그러다가도 아군이 습격을 받으면 물불 안 가려. 한번은 절벽 밑을 지나가는데 위에서 베트콩이 기관총으로 아군들을 드르륵 쏘는 거야. 그러니까 어느 병사가 그 절벽을 막 기어 올라가서 결국 그 베트콩을 잡더라니까.”
박씨도 총격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적이 있다. 작전 중 총격 소리가 들리더니 무전기 안테나가 총에 맞아 날아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적이 사라진 뒤였다.
서로를 향한 적개심은 전장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만나 배가되기도 한다. “한번은 포로로 잡힌 우리 군을 적들이 살가죽을 다 벗겨서 내놓은 거야. ‘한국군은 다시 여기 오지 말라’는 문구가 한글로 쓰여 있었지. 그러니 눈이 뒤집히지 않겠어? 그다음엔 우리 쪽도 비슷하게 했지. 서로에게 비극적인 일이었어.”
박씨의 일기 한편엔 ‘VC(일명 베트콩) 2명 사살’ ‘적군 5명 사살’ 등의 메모가 자주 나왔다. 개중에는 “총을 들지 않은 적군” “낚시를 하고 있던 VC”를 잡았다는 대목도 있다.
이들이 민간인일 가능성은 없었을까. 박씨는 “작전지 안에 있는 남자는 다 베트콩으로 본다. 여성과 노인은 거의 볼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백마부대와는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군이 작전지로 삼은 ‘자유사격지대’는 전략촌으로 이주하지 않은 거주민을 모두 잠재적 게릴라로 간주해 살상하도록 허락한 구역이었다. 애초부터 거주민과 적군을 또렷이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한 한베평화재단 누리집에 공개된 베트남 정부 쪽 문헌엔 백마부대도 민간인 학살의 주체로 적혀 있다. 해당 문헌은 베트남 푸옌성 뚜이안현 안닌 일대에서 맹호와 백마 사단이 주민들을 대거 학살했다고 적었다.
쉰 김치조차 국가 생각하며 먹었다
베트남에선 사소한 선택조차 국가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쉰 김치 통조림’ 일화가 유명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로 국내 기업들이 베트남에 김치 통조림을 만들어 보냈는데, 가공 기술이 미흡해 김치가 다 쉬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걸 안 먹으면 일본산을 먹어야 한다”는 채명신 장군의 설득에 군인들이 불평 없이 쉰 김치를 먹었다고 알려져 있다.
박씨도 그 김치를 다 먹은 기억이 있다. “우리가 이걸 먹어줘야 한국 가공 기술이 발전한다, 쉬었다고 안 먹으면 한국 경제 발전이 더뎌진다 그랬어요. 그래서 그 맛없는 김치를 어떻게든 다 먹었지.”
국가 발전이라는 간명한 구호로 모든 것을 설명하던 시대였다. “조국의 가난과 싸운다”는 명제가 크고 작은 선택을 좌우했다. 오늘날 월남 참전군인들이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공로를 인정해달라’고 목소리 높이는 배경이기도 하다. 박씨도 현재 40여만원 수준인 참전 명예수당을 더 올리고 유공자로서 예우도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베트남전 파병을 유공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지점도 존재한다. 베트남전은 베트남 민중의 외세 저항 투쟁을 미국이 국제전으로 확전했다. 명분이 없어 미국 우방국도 파병을 꺼렸던 전쟁에 한국이 정치·경제적 이익을 바라고 32만 명을 파병했고, 5천 명 넘는 국민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군인들도 전장 트라우마와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린다.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베트남 민간인은 9천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박씨의 마음도 복잡하다. 전사자들을 생각하면 국민을 전투병으로 파병하는 선택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면서도, 결과적으로 파병으로 인해 가난에서 벗어난 데 안도하는 마음도 있다. 베트남 주민들이 남의 땅에서 전쟁한 한국군을 원망하는 게 당연하다면서도, 한국 국민만큼은 살아 돌아온 군인들을 고맙게 여기고 대우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다.
“양가적 시선? 그 지점이 대화 주제”
이런 양가적 마음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빈딘성으로 가는 길>의 저자 전진성 부산교육대 교수는 참전자와 시민사회가, 또 피해자와 가해자가 충돌하는 이 지점이 비로소 한국 사회가 논의해야 할 주제라고 본다.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은 평화와 생명존중의 관점에서는 결코 옳았다고 할 수 없다. 타국 전쟁에 우리 국민을 파병 보내 수많은 전사자가 나왔고 베트남 주민 희생자도 많았다. 그런데 개개인의 관점에선 국가 공동체에 헌신한 것이다. 국가 명령에 따라 헌신한 군인들은 응당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사회 정의가 실현되지 못했다. 베트남전 때 전방에서 싸운 군인 중엔 귀국박스(귀국 준비 선물을 넣어오도록 배려한 제도)는커녕 목숨만 겨우 건지고 온 사람도 많다. 한국 사회의 파병 결정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면서도 공동체에 헌신한 사람들을 어떻게 예우할지 논의해야 한다.”
전 교수는 군인 개개인의 전쟁 책임을 어떻게 물을지도 논쟁적인 주제라고 말한다. “베트남전 자체가 연합군의 압도적 군사력 우위 속에서, 민간인과 군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치른 전쟁이다. 군인들은 (무력을 행사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았을 테고 거부하기 힘들었을 테다. 하지만 결국 (민간인을 향해) 마지막에 방아쇠를 당긴 것은 군인 자신이다. 어떤 알리바이를 덧붙여도 도덕적으로 면책되진 못한다. 전쟁범죄에서 군인의 도덕적 책임을 어떻게 다룰지, 전쟁법을 위반하라는 명령으로부터 군인 개개인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등을 논의할 때다.”
양자의 간극을 섣불리 좁히지 않고 대화의 지평을 넓혀보자는 제안도 있다. 석미화 아카아브평화기억 대표는 “국가의 파병 결정이 옳다고 할 순 없지만 그 구조 아래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순 있다”고 말한다.
“냉전시대의 문법으로 베트남전을 명예롭게 기억하려는 참전군인들의 시도가 대중에게 그대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1940~1950년대생들이 겪은 가난과 참전 결정, 전쟁 경험을 쭉 듣다보면 그 주장을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전쟁 세대와 그 이후 세대가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는 참전군인 개개인이 전쟁의 생생한 증언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전쟁이라고 하면 우리는 폭탄 터지는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만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의 전장은 아군의 허무한 죽음이나 암거래 시장 등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 군인들도 계급과 위치에 따라 저마다 다른 전쟁을 경험한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로선 그들의 증언을 통해 전쟁의 여러 얼굴을 보는 셈이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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