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고 무해한 ‘애착 키링’엔 없는 것[언어의 업데이트]

기자 2024. 3. 1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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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불경기에 털이 복슬복슬한 인형이 인기라고 한다. ‘하찮고 무해한’ 것들이 주는 촉감과 위로 때문이다. 사람들의 머리카락 색과 외투 색이 모두 비슷한 지하철 출근길에 나만의 새로운 구경거리가 바로 그 인형이다. ‘애착 인형’이 달린 가방이 많아진 덕분에 각기 다른 가방에 서식하며 달랑거리는 친구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루에 적어도 열 개 넘는 인형을 만나고 있으니 요즘 이 ‘애착 인형’이 인기임도 분명하다. 고르는 마음도 사는 마음도 그리하여 가방에 거는 마음도 다 좋다. 어쩐지 지치는 출근길도 그 인형들을 보면 피식 미소가 지어진다. 그 웃음이 하루의 시작에 연료가 된다.

무해함, 하찮음 같은 단어가 몇년째 꾸준히 사용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언젠가부터 ‘하찮다’는 비하의 의도 대신 ‘무해하고 귀엽다’는 의미로 더 익숙해졌다. 나를 해치지 않을 유약함이 그 자체로 위안을 준다. 자극적 콘텐츠로부터 해독을 위한 ‘무해한 콘텐츠’의 인기도, 슈퍼 히어로 대신 작고 먼지처럼 귀여운 ‘작먼귀’ 캐릭터의 인기도 이 맥락의 연장선상이다. ‘무해’의 힘은 식품업계에서도 통한다. 칼로리나 당, 알코올 등을 뺀 ‘제로’ 제품들도 내 몸에 무해함을 강조하며 인기를 끈다. 과잉 자극과 경쟁의 시대의 반대급부로 ‘무해’는 참 잘 팔리는 언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지치면 무해의 그늘 아래서 오래 쉬었다. 아는 얼굴이 하는 아는 얘기를 듣고 싶고, 경쟁도 다툼도 없이 그저 사랑과 격려만 가득한 것들을 봤다. 애쓰지도 힘쓰지도 않는 것들 사이에 나를 두면 얼마간은 평온했다. 도피는 쉬운 생존 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해함’이나 ‘하찮음’은 심리적 장소의 언어다. ‘무해’에는 도피처이자 휴식처로서의 장소성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슬프고도 당연하게도 이 장소는 영원하지 않다. 나는 곰인형 키링처럼 누군가의 가방에 위탁해 살 수 없다. 어쩌면 내 상황은 삶의 터전이 녹아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북극곰에 더 가깝다. 잠시 숨을 돌리고자 무해의 그늘에 숨는 시간은 필요하지만 구름이 조금만 비켜도 그늘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내게 더 필요한 건 ‘유해함’을 스스로 극복하는 면역력과 근육을 키우는 일이다. ‘무해함’으로 포장된 쉬운 위안으로부터 한 발짝 나와 현실에 건강히 맞설 힘. 해로움의 유무가 아닌 이로움의 유무가 다시 내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무해함 대신 ‘이로움’을 취해야 할 시간이다. 물론 이로움은 쉽게 얻어지지 않겠지만.

아이와 함께 읽은 기린 책에서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기린은 다리 근육이 튼튼해 위급 상황에서 사자를 뻥 하고 차버릴 수 있다고 한다. 항상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사자로부터 부리나케 도망가다 이내 목을 내어주는 기린의 최후를 봤던 나는 기린이 사자를 뻥 차버리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발차기를 위해, 기린이 매일 힘겹게 걸었을 드넓은 초원의 뙤약볕을 떠올린다. 고통 없이 생기는 근육은 없고, 하루아침에 장착되는 면역력도 없다. 강한 다리 근육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만 먼저 사자를 해치지 않는 기린처럼 자신에게 진짜 이로운 게 무엇인지 알고 그걸 키우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책을 다 읽고, 매일 바라보기만 하고 정작 살 생각이 없었던 ‘애착 키링’으로 기린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내 아이만큼은 기린이 아니라 사자 인형을 달아주고 싶은 이 마음은 무엇일까?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정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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