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 '어둠의 아이유' 비비를 양지로 끌어내 얻은 제2의 도약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2024. 3. 1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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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장기하, 사진='밤양갱' 뮤직비디오 영상 캡처

요즘 가수 비비(본명 김형서)가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신곡 '밤양갱'으로 음원 절대 강자이자 차트의 여왕인 아이유를 뛰어넘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놀랄만한 흥행을 이끈 '밤양갱'을 작사·작곡한 주인공이 아이유의 옛 연인 장기하라는 것이다.

그럼 우선 비비에 관하여. 1998년생인 비비는 올해 26세. 2018년 SBS 오디션 '더 팬'에 출연해 얼굴을 알리고, 2019년 싱글 '비누'를 발표하면서 데뷔해 이제 6년 차 뮤지션이다. 주로 힙합, R&B, 랩 장르에 몰두해 거침없는 스타일을 보여주며 MZ세대의 공감을 얻었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외모도 매력적이다. 이미 눈 밝은 감독들에게 발탁돼 영화 '유령' '화란', 드라마 '최악의 악' 등으로 연기 데뷔했다. 송중기와 호흡을 맞춘 '화란'으로는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둘 다 되는 멀티 엔터테이너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다음엔 아이유. 그 또래 세대에서 멀티 엔터테이너하면 아이유가 여전히 '원톱' 아닐까. 1993년생인 아이유는 올해 31세가 됐다. 비비하고 다섯 살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2008년 '국민여동생'으로 데뷔해 벌써 16년차 베테랑 가수다. '좋은 날' '팔레트'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밤편지' 등 수많은 히트곡을 냈다. 댄스 발라드 장르에 '3단 고음'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됐다. 연기자로도 호평받아 기억에 남는 작품이 꽤 많다. '드림 하이' '최고다 이순신' '프로듀사' '나의 아저씨' '호텔 델루나' 등등. 처음 시작한 음악적 장르만 조금 다를 뿐 비비와 아이유는 서로 많이 닮았다. 아니, 비비의 '지금'은 10여 년 전 아이유의 '그때'를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비비의 '밤양갱'이 멜론, 지니뮤직 등 각종 음악 차트에서 '넘사벽' 아이유의 새 앨범 '더 위닝(The Winning)'의 수록곡 '러브 윈스 올(Love wins all)'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면서 장기하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진='밤양갱' 뮤직비디오 영상 캡처 

앞서 말했듯이 '밤양갱'은 장기하가 만들었다. 장기하 특유의 음악적 색채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가져온 노랫말에, 엇박자인 듯하면서도 중독적인 멜로디가 특징적이다. "떠나는 길에 니가 내게 말했지∼/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나는 흐르려는 눈물을 참고∼/하려던 얘길 어렵게 누르고∼" 멜로디는 물 흐르듯 경쾌하지만 정작 가사는 은근한 슬픔이 고여 있다. 오래 전 첫사랑을 기억나게 하는 힘이랄까. 그래서인지 팬들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하는 특유의 위트로 '애이불비(哀而不悲·슬프지만 비참하지 않음)'의 정서를 견지한다.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 "내가 먹고 싶었던 건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이야". 첫사랑의 아픔을 달래줄 만한 간식으로 밤양갱만큼 부드럽고 달콤한 게 어디 있으랴.

장기하의 '밤양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비스럽기보다 아이유 같다. 힙합과 R&B를 하던 '어둠의 아이유' 비비는 '밤양갱'에서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발라드 보컬로 변신했다. 마치 아이유의 '좋은 날'과 '밤편지'를 섞어놓은 느낌이다. 반면 30세를 넘긴 아이유는 '더 위닝'의 '러브 윈스 올'을 비롯해 '홀씨' '쇼퍼(Shopper)' 'Shh‥' '관객이 될게' 등 모두 직접 작사한 곡을 힙합과 일렉트로 팝으로 버무렸다. 비비는 아이유로, 아이유는 비비로 서로 옷을 바꿔입은 셈이다.

장기하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밤양갱'을 통해 그는 솔로 활동 이후 가장 큰 도약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싱글 '싸구려 커피'로 데뷔한 장기하와 얼굴들은 애초 "가장 멋진 모습일 때 아름답게 밴드를 마무리하자"는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2018년 연말 공연을 마지막으로 10년간의 밴드를 해체하고 홀로서기에 나섰다. 그러나 솔로 활동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장기하가 2020년 9월 출간한 에세이 '상관없는 거 아닌가'에는 이런 고민이 짙게 드러나 있다. 굳이 뭔가를 욕심내지 않고 손과 마음이 가는 대로 쓴 일상이지만 밴드 해산 이후 한동안 슬럼프를 겪은 듯하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희귀병인 '국소성 이긴장증'을 고백하며 싱어송라이터로서 악기를 다룰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는 긴장하면 왼손이 굳어지는 병 때문에 드럼도 기타도 칠 수 없었다. 공식적인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치명적인 약점. 자괴감에 빠졌고, 방황의 시간이 길어졌다. 

사진='청룡영화제' 수상 축하 무대 영상 캡처

그러다가 2022년 2월, 장기하는 솔로 미니앨범 '공중부양'으로 돌아왔다. 밴드 해체 후 4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밴드를 마무리했지만 은퇴한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도 은퇴 오해를 받을 때, 사람마다 내 이야기를 다르게 이해하는구나 하고 느꼈다"면서 "새 음반을 만들면서 내 정체성은 뭘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2년 정도 썼고, 그 후 1년간 새 음반을 만들었다. 솔로 장기하의 기본값을 보여 드린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공중부양'에는 '뭘 잘못한 걸까요' '얼마나 가겠어' '부럽지가 않어' '가만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다' 등 직접 작사·작곡한 5곡이 실려 있다. 제목만 들어도 곡의 흐름이 연상되는, 장기하표 '일상'의 재현. 자신의 정체성이야말로 평범하지만 섬세한 노랫말이고 목소리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결과물이었다.

이후 장기하는 이전보다 더욱 왕성하게 솔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비비의 '밤양갱'을 만든 것은 물론 뮤직비디오에도 직접 출연했다. 이별하는 남자친구로 잠깐 등장하는데 연기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또 6일 개봉한 한국계 캐나다 영화감독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에선 극 중 남자 주인공 해성(유태오)의 친구를 맡았다. 송 감독에 따르면, 장기하는 원래 해성 역의 오디션에 참가했다. 결국 해성 역은 유태오가 하게 됐지만 친구 역할도 마다치 않았다. 지난 여름엔 류승완 감독의 영화 '밀수'의 음악감독을 하기도 했다. "데뷔 16년 만에 음악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는데, 그는 다시 영화음악에 도전할 계획이란다.

홀로 선 장기하의 두 번째 행보가 바삐 펼쳐지고 있다. 원동력은 공교롭게도 아이유와 비비 사이의 어디쯤. 그리고 더욱 강렬해진 장기하표 일상의 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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