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죽음은 가장 큰 스승’
존엄사를 희망하며
여생의 의미 달라지게 하는 일
두려운 고독사…존엄한 죽음 고민
친구들과 연명치료 거부 서약
지금의 삶, 조금 더 잘 살고파
지난달 초, 드리스 판아흐트 네덜란드 전 총리 부부가 동반 안락사를 택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93살 동갑인 두 사람은 뇌출혈 후유증 등으로 고통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판아흐트 전 총리가 평생을 가톨릭 교인으로 살아왔기에 안락사를 택했다는 사실은 특별해 보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죄악으로 간주하지요. 안락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했고, 지금은 전체 사망자의 약 5%가 이런 경우라고 합니다.
스위스 조력사 단체의 한국인 회원
제가 안락사 혹은 조력사에 대해 처음 관심 가진 건 6년 전입니다. 2018년 5월10일, 104살인 데이비드 구달 오스트레일리아 이디스카원대학 명예교수가 스위스에서 조력사를 선택했다는 신문 기사를 봤습니다. 그는 아흔이 돼서도 테니스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고, 100살이 넘어서도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102살이던 2016년, 학교는 그의 안전한 출퇴근을 염려하며 퇴임을 권했습니다. 이는 자기 삶의 질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더구나 2018년 초 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지만, 혼자 살던 터라 이틀 뒤 발견될 때까지 꼼짝없이 홀로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조력사를 결심한 이유였다지요. 관련 영상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 한 사람 한 사람과 따뜻하게 이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 마음 아프고 슬프면서도 또 한편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예정된 죽음을 앞두고 한 마지막 언론 인터뷰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힘차게 불렀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노년에 홀로 살면서 종종 삶의 마지막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1인 가구의 거의 절반이 그러하듯, 저 역시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경제적 상황에 따라 홀로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다를 순 있겠으나, 누구나 죽는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총리도, 교수도, 부자도 결국 혼자가 됩니다. 그리고 누구나 죽습니다. 어찌 보면 참 평등한 것이지요.
존엄사·조력사·안락사 등에 관한 관심이 생기면서 자료를 찾다가 저는 ‘디그니타스’라는 스위스 조력사 관련 단체 누리집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3월 언론 보도를 보면 ‘디그니타스’의 한국인 회원 수는 117명에 이릅니다. 일본·중국의 갑절 수준으로, 아시아 국가 중 제일 많습니다. 전체 97개국 중에서도 11번째라고 합니다. 또 다른 보도를 보면, 디그니타스, 페가소스, 라이프서클 등 조력 사망을 돕는 단체를 통해 죽음을 택한 한국인은 지난해까지 10명가량 된다고 합니다.
최근엔 영화 ‘플랜 75’를 봤습니다. 영화는 75살이 되면 누구나 건강 상태와 무관하게 정부의 안락사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 있다는 가상의 사회적 안락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를 만든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최근 인터뷰에서, 2년 전 일본에서 영화가 개봉됐을 때 있었던 고령자와 젊은 관객들 간의 대화를 소개하며 누구나 자신이 죽는다는 당사자성을 확인하고 깊이 생각하며 상호 공감의 기회를 가질 것을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존엄한 죽음이란 자신을 소중한 존재라고 느끼면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닐까”라고 한 감독의 말이 참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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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산다고 우쭐대지 말자
한국에서는 임종을 앞둔 경우 소극적 안락사가 가능합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가 2018년 2월부터 시행되고 있지요.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억지로 살려놓고 고통만 가중하는 다양한 생명유지 장치를 미리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120만명이 넘게 등록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해 가을, 등산 친구들과 함께 산행 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신청했습니다. 등록 과정은 비교적 단순했지만 또 범상치도 않았습니다. 마치 내가 나의 죽음을 관장하는 것 같은 어색하고 묘한 그리고 엄숙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청서를 작성한 뒤 친구들과 함께 평소처럼 반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 분위기는 10여년 함께했던 뒤풀이와는 달랐습니다. 남의 죽음을 애도하고 문상하면서 느끼는 것과는 달리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각자, 그리고 함께 생각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은퇴 뒤 노화를 겪으면서 나의 몸과 마음에서 한계를 느낍니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불안하고 우울했지만 차차 그 한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관심이 밖에서부터 점차 안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들리지 않았던 것이 들리기도 합니다. 올해 만 칠십이 되면서 내게 몸의 삶, 마음의 삶이 몇년이나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노화를 자각하면서 자연스레 죽음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면 크게 울어야만 건강이 확인된다고 합니다. 첫울음으로 폐의 세포들이 순식간에 팽창하면서 숨을 쉬게 되고, 심장과 다른 장기에 산소가 보내지면서 비로소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첫 숨으로 시작된 삶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소멸하게 됩니다. 태어나서 살다가 결국은 죽음으로 가는 대자연의 법칙 앞에서 종종 저는 무력감을 느끼지만,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박혜상의 최신 음반 타이틀 제목은 ‘숨 쉬어라’(Breathe)입니다. 앨범 재킷 이미지는 물속에 있는 그의 모습입니다. 그가 코로나19 기간 동안 공연이 취소돼 겪었던 좌절과 절망, 우울을 견뎌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는 프리다이빙을 배우고 촬영을 하면서 물속에서 호흡을 참는 극치에 갔을 때의 침묵과 평화로움을 얘기합니다. ‘물속에서 숨 쉬는 꿈’ 얘기를 합니다. 앨범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사는 동안’(While You Live)의 뮤직비디오에서 그 모습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소리를 내는 것이 직업인 소프라노가 숨을 참으며 침묵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얘기합니다. 고요함과 정적의 무음을 모르면 음악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숨에만 의지해서 평온하게 감사와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가장 큰 스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죽음이 내게도 순식간에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현재 삶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좀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조력사도 안락사도 모두 몸의 고통과 몸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몸의 죽음뿐만 아니라 마음의 죽음도 궁금해집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오늘은 승리했으나 우쭐대지 말라. 언젠가는 죽는다’는 의미로 로마의 개선장군 퍼레이드 뒤에서 노예가 외치도록 했다는 이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숨 쉬며 사는 지금의 삶을 조금 더 잘 살고 싶습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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